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2) 유년의 삽화 1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2) 유년의 삽화 1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4.26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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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차 전주에 들렀다가 가족 친지들과 포즈를 취한 코리아나의 멤버들. 앞 좌로부터 두번째 이승규(필자) 이애숙, 홍화자, 이용규.

 우리들의 아버지 이정한(李廷漢·1974년 3월14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작고)와 어머니 유정환(劉貞煥·1968년2월18일 태국 방콕에서 작고)는 범규·명숙·재현·승규·용규·상규·애숙 등 5남2녀를 낳았다.

 아버지는 일제말기에 일본 큐우슈우 지방에 징용으로 끌려가 해방직전인 1945년초에 탈출, 오오사카 근처의 산에서 숨어 지내다가 해방을 맞이했다고 한다.

 해방과 함께 관부연락선을 탄 아버지는 곧바로 경찰에 투신했고, 1950년 6.25가 끝날 무렵에 군산에서 충북 청주출신인 어머니를 만나 결혼, 군산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충주에서도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지금의 동경 음대 전신인 동경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 소프라노가수로 활약하다가 6.25전쟁이라는 민족의 비극 와중에서 경찰전문학교에 입학,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경찰관이었기 때문에 근무지가 바뀔때마다 가족들은 이삿짐을 야 했다. 그런 연유로 우리 형제들의 출생지는 모두 다르다. 형님 두 분은 군산이고, 누나는 전주, 나 승규는 무주, 용규는 이리, 상규는 남원, 막내 애숙의 출생지는 부산으로 돼있다.

 아버지는 이리를 거쳐 남원에서 근무하다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경찰관을 그문두고 부산으로 이사했다.

 아버지가 부산 국제극장을 다른 몇 사람과 인수, 운영에 참여한 것이다. 우리 가족은 당장 살곳이 없어 국제극장 옥상에서 천막을 치고 몇개월 살았는데 서울에서 쇼단이 내려와 공연을 열면 우리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몰래 극장에 숨어들어가 공연을 보곤 가수들의 흉내를 내곤했다.

 나(이승규)는 제법 머리가 좋았던 모양이다. 남들보다 두 살이나 어린 다서살때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공부를 매우 잘했었다. 나는 형들과 용규가 성적이 신통치 못했던 것에 비해 매일일같이 백점을 받아와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부산 영도국민학교 4학년 때 나는 전만경씨로부터 탭댄스를 배우고, 국제극장의 공연당 김진걸씨에게서 발레를 배웠다. 그무렵 나는 공연하러 내려온 연예인들 앞에서 두 분한테 배운 춤을 뽐내곤 했는데 연예인들은 나의 재롱에 감탄, 아버지에게 아들을 무대에 세우라고 적극 권했다.

 아버지는 이들의 권유에 못이겨 나를 장난삼아 무대에 올렸는데 나의 탭댄스는 관중들을 열광시켰다고 한다. 그때 쇼에 참가한 연예인들이나 관중들은 나의 연기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아버지에게 본격적인 연예인으로 키우라고 성화가 대단했다고 한다.

 결국 그날 내가 장난삼아 무데에 선 것이 우리 전 가족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 되었는데 정작 우리들의 운명을 바꾸게 한 것은 아버지의 또다른 결정이었다.

 <정리 김순환 기자>
 

옮긴이 김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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