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에서 ‘빛’으로
‘빚’에서 ‘빛’으로
  • 김성철
  • 승인 2019.04.23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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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정치학』 에서 “돈이란 교환에 사용되기 위한 것이지 이자로 불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고리대금업을 비난했다. 8세기 중세 유럽에서는 대부업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일 뿐, 담보도 없고 신용도 낮아 이중고를 겪는 서민들에게 사채는 현재에도 여전히 필요악으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8년 IMF 외환위기 이후 이자 제한법이 폐지되면서 사채 시장이 급격히 커졌다. 그러자 상상을 초월한 높은 이자와 폭력적 추심 행위가 만연해지고 이를 견디지 못한 채무자들은 삶을 포기하거나 가정이 파탄 나는 등 심각한 부작용을 겪게 된다. 이후 2002년 ‘대부업 양성화’가 시행되면서 이자율 등에 규제를 받게 되고 2007년에는 ‘이자 제한법’이 부활했다. 현재 2018년 2월부터는 금전대차에 관한 계약상의 최고 이자율은 24%를 초과할 수 없다.

 그러나 먹고살기 빠듯한 서민들에게 24%라는 수치는 여전히 넘지 못하는 높은 벽일 뿐이다.

 김민희가 주연을 맡아 호평을 받았던 영화 <화차>는 사채 때문에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작은 일본 소설가 미야베 미유키가 1992년에 출간한 동명 소설로 출간당시 일본 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일본은 버블경제가 막 끝나고 극심한 경제난을 겪던 시절.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릴 만큼 어려웠던 그 시기에 신용불량, 개인파산, 사채, 사회적 무관심 등 당시 일본 사회가 겪고 있던 문제점들이 총망라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정확히 20년 후 영화를 통해 들여다본 한국의 풍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당황할 뿐이다.

 주인공 선영의 아버지는 담보와 신용이 없어 사채를 끌어다 쓰고는 자살을 하고 만다. 이후 엄마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가 유산처럼 남긴 사채의 잔상으로 선영의 삶은 엉망진창이 된다. 결국 그녀는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다른 사람으로 살기를 작정하고 타인의 이름과 삶을 훔친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을 앞둔 어느 날 개인파산자여서 신용카드 발급이 어렵다는 전화를 받고 사라져 버린다.

 여기서 문제는 신용등급이다. 개인파산을 선언할 정도면 신용등급은 9-10등급까지 내려가는데 현재 6등급 이하 신용 등급으로는 카드 발급이 어렵다 보니 아마 영화 속 선영도 신용 등급이 낮아 카드 발급이 거절됐을 것이다.

 선영의 파산 원인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카드 사용이 늘어나고, 여기에 연체금이 생기자 연체금을 갚기 위해 현금 서비스로 돈을 빌렸다. 설상가상으로 현금 서비스 이자가 불어나면서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에 손을 벌리며 높은 이자에 원금의 몇 배에 달하는 빚이 생기자 불어난 돈을 갚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런 문제가 단지 영화나 소설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악순환의 풍경이다.

 사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차경선’이다. 훔친 이름 ‘강선영’으로 살 때 그녀는 잠시나마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빚이 빚을 낳고 타인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한들 그전보다 나아진 것도 없었다. 결국 죽음만이 세상의 모든 빚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였던 그녀의 삶이 참으로 가엽다.

 현재 시중 은행들은 대부분 자산관리(WM)에 치중하고 있다. 즉 부의 관리다. 그러나 서민들은 빚이 더 많다. 그러나 이들은 상환의지가 있어도 제대로 된 심사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은행에서 충분히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조차 고금리 대출로 인해 부채를 갚아도 원금이 줄어들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신용 등급은 낮으나 상환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사람은 부실을 잘 안 낸다. 따라서 지금 진행하고 있는 전북은행의 따뜻한 신용대출의 가장 핵심은 ‘상환의지’다. 물론 상환의지는 점수화가 쉽지 않기 때문에 심도 있는 상담을 진행하고 고객의 여건에 맞춰 중금리 대출로 금리 절벽을 해소시키는 절차를 밟아가고 있다.

 단순히 신용등급 같은 수치에 매몰되지 않고, 개개인의 상환 의지와 미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 기회를 제공하고 상생하는 방법들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 금융이 해야 할 역할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포용적 금융이란, 이 시대의 수많은 ‘차경선’에게 “당신도 잘 사는 방법이 있다고,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해보자”는 격려와 희망의 빛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희망의 작은 불씨를 우리와 함께 피워 냈으면 좋겠다.

 김성철<전북은행 부행장>  

 약력 ▲서신동지점장 ▲영업추진부장 ▲인사지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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