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1) 사모곡(思母曲)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1) 사모곡(思母曲)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4.23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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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신덕면 삼길리 내량산 뒷산에 있넌 부모님 묘소에 단체로서 첫 수상한 문화훈장을 바치고 있는 코리아나 그룹 멤버들.
임실군 신덕면 삼길리 내량산 뒷산에 있넌 부모님 묘소에 단체로서 첫 수상한 문화훈장을 바치고 있는 코리아나 그룹 멤버들.

 1990년 11월1일 목요일 6면
 

 1990년 10월21일 전북 임실군 신덕면 삼길리 내량 뒷산.

 유난히 청명한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나(이승규), 형수(홍화자), 동생들(용규·애숙) 그리고 우리 코리아나 그룹의 김영일 단장은 고향의 대지에 가슴을 열고 부모님이 살아 생전 그렇게도 바랐던 수많은 갈채와 함께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부모님 영전에 바쳤다.

 우리들은 바로 어제(10월20일) 서울 중앙 국립극장에서 한국의 예술인으로서 전세계에 국위를 선양한 공로로 단체로서는 첫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고, 전주시 완산동에 있던 선산을 이곳으로 이장한 이래 처음으로 부모님 묘소를 찾아 가슴 벅찬 눈물을 흘린 것이다.

 삶과 죽음, 산자와 죽은자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대화통로인 부모님의 묘지 앞에서 우리들의 성장을 끝내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 아버지. 고향을 떠나 유랑을 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요 /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 우리들은 언제나 조국을 생각했고 / 고향과 아버지 어머니 생각에 / 숱한 낮과 밤을 이국의 땅에서 울었답니다.

 어느 인간이나 생의 마지막 눈물을 고향의 흙가슴에 뿌리듯이 / 우리들은 기약없는 떠돌이 생활속에서 부모님과 고향을 그리워 했답니다.

 지나온 날 그 끝없는 좌절과 영광의 뒤안길에서 / 나날이 선명하게 떠오르던 고향 산천과 부모님 얼굴 / 눈물의 여정으로 얼룩진 공연길에서도 갈채와 환희의 영광뒤에도 언제나 고향은 따스한 그리움으로 남아 / 우리 형제들의 포근한 품이 되었답니다”

 이역만리 외국의 수많은 낯선 도시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공연하면서도 꿈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고향 전라북도(全羅北道). 굳이 전라도(全羅道)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들도 한국문학의 원형을 발견하려면 흔히 전라도를 말하고, 그중에서도 예술의 도시 전주(全州)를 일컫는다는 땅.

 우리들은 전북에서 태어난 것이 지금처럼 자랑스러울 때가 없다. 한국의 소도시 전주에서 태어나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인기 팝그룹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하나의 센세이션이요, 혁명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어느 곳에서 태어난다 해도 다시 이런 영광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이 모두가 우리 코리아나 그룹을 아끼고 사랑해 준 우리들의 고향 전북 사람들과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 덕분이라 생각한다.

 재정러시아의 시인 네크라소프의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말처럼 우리들은 조국과 고향에 대한 뜨거운 애착으로 좌절과 절망의 늪을 벗어나곤 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부수어야 할 장벽, 그 끝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장벽을 넘어서 세계인이 사랑하는 음악그룹으로 당당히 선 것이다.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우리들을 키우기위해 온갖 뒷바라지를 하다가 끝내 자식들의 성공을 생전에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지금 이 순간에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이 선명하게 들려오는 것 같아 가슴이 메어온다.

 “세계적인 음악인으로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로 조국에 돌아오지 말 것이며, 고향땅을 밟지 말아라”

  

 <정리 김순환 기자)

옮긴이 김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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