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빌려 쓴 안경, 삶이 녹아있는 김호석의 그림 앞에서
수도자가 빌려 쓴 안경, 삶이 녹아있는 김호석의 그림 앞에서
  • 김미진 기자
  • 승인 2019.04.1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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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 트라피스트 봉쇄 수녀원에서 수도 중인 장요세파 수녀가 한 편의 그림에 반해 생면부지의 작가를 수소문한 끝에 인연을 맺었다. 바로, 정읍 출생의 김호석 화백이다. 그리고 그의 그림에 진정성 있는 글을 붙여, 세상을 읽기 시작했다.

 ‘수녀님, 화백의 안경을 빌려 쓰다(도서출판 선·2만9,000원)’은 김호석 화백의 작품에 대한 장요세파 수녀의 감상을 모아 붙인 산문집이다. 장요세파 수녀는 그의 그림을 소개하면서 그에 얽힌 여러 일화, 그리고 삶의 단상을 부드러운 글솜씨로 전한다.

 김호석 화백은 한복을 입은 노무현 전 대통령, 법정 스님, 성철 스님 등의 수묵 인물화로 이름을 날려온 인물이다. 그는 역사화, 농촌 풍경화, 역사 인물화, 서민 인물화, 가족화, 군중화, 동물화 등의 작품을 통해 우리 시대의 정신과 삶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데 몰두해왔다.

 살아 있는 시선, 맑은 표정으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걷힌다. 김 화백의 그림에는 바로, 그 올곧은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다.

장요세파 수녀가 김 화백의 그림에 매료된 것은 ‘세수하는 성철 스님’이라는 작품을 알게되면서부터다. 그림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체계적인 공부도 하지 않았지만 루오, 렘브란트, 고흐, 샤갈, 일리야 레핀 등 한정된 취향 안에 있었던 저자의 폭좁은 편견을 한 방에 깨준 작품이었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그림에 대한 방향성은 예술적 취향이나 탐미적 추구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수도생활의 한 부분이요, 방편이었기에 그림의 아름다움보다는 그 정신성에 먼저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면도 있다”면서 “이런 정신 세계를 이렇게 은유로 압축할 수 있는 화가, 그러면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예술성의 조화 앞에 조금 과장하면 넋을 잃었다”고 했다.

당시, 한 달에 한 번 그림에 대한 묵상글을 써서 수도원 은인들에게 보내는 일을 맡고 있었던 저자는 화백의 그림을 그렇게 사용하기 위해 허락을 얻고자 백방으로 연락처를 찾았고, 마침내 인연이 닿기에 이르렀다.

 첫 번째 전화 통화 후 받아들게 된 김 화백의 도록에는 ‘황희 정승’, ‘마지막 농부’ 등 251편의 작품이 수록돼 있었다. 그런데 보는 것마다 저자의 영혼을 비집고 들어왔다.

 저자의 말마따나, 김 화백은 돈과 발전을 향한 맹목성, 생명경시 등의 풍조가 만연한 이 시대의 세계관을 다시 보고 일으켜줄 수 있는 작품을 그리고 있었고, 이런 시대를 향한 화백의 절절한 사랑고백 같은 그림을 페이지마다 발견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과거에 발을 딛되 현재의 역사적인 문제, 시대의 아픔, 그림자에 누구나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림의 주제로 삼은 화백의 노력은 통했다. 가벼운 읽을거리가 만연한 이 시대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기 충분해 보인다.

 화백의 그림과 수녀의 글을 곱씹으며 책장을 넘기다 보니, 총 415 페이지에 이르는 두께의 양식이 순식간에 가슴에 아로새겨진다.

 책의 표지는 예순이 넘어 처음으로 그렸다는 김 화백의 초상화가 장식하고 있다. 생의 굽이 굽이마다, 자신의 삶을 걸고 그림에 투신한 화백의 열정 가득한 눈빛에 가슴이 저린다.

 김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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