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미륵사지석탑”
“미안해요. 미륵사지석탑”
  • 박인선
  • 승인 2019.03.29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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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를 마친 미륵사지석탑(사진=문화재청)
수리를 마친 미륵사지석탑(사진=문화재청)

 1994년, 완주송광사의 천왕문에 안치된 ‘사천왕상’이 KBS2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조명되었던 적이 있다. 한적한 지방사찰에 대한 관심은 어느 대학원학생의 졸업논문을 통해 호남지역의 사찰에서 보여지는 사천왕상을 조형학적 측면에서 다루어졌다. 등록문화재도 아닌 오직 신앙의 대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두 손 모아 합장하는, 먼지만 뿌옇게 앉아 빛바랜 불상이 학생의 오감을 깨우면서다.

 방송에 소개되면서 새롭게 조명되다보니 우선 불상의 안전에 대한문제와 보수가 사찰 측의 관심사였다. 그해 봄 어느 날, 미술을 전공한 필자에게 보수를 요청해 왔다. 누군가가 손재주가 좋다고 소개했던지, 주지스님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이렇게 시작된 수리작업으로 조성연대조차 알 수 없었던 수수께끼가 한 불상의 머리 부분에 표기 된 명문이 발견되면서 풀리게 되었다. 의미 있는 결과였다.

 조성연대가 밝혀졌으니 문화재등록(보물 제1255호)을 통해 보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때만 해도 미등록문화재에 대한 보수와 관리가 사찰의 소관이었다. 살림살이가 신도들의 시주에 의존하다보니 보수를 비전문가에 맡길 만큼 사정은 녹록지 않았다. 이런 계기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문화재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완주송광사 사천왕상을 보수하면서 비롯되었다. 학교에서 한국미술사를 통해 가벼운 접근은 있었지만, 직접문화재를 현장에서 맞닿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호남지역의 사찰답사를 통해 송광사 사천왕상이 갖는 조형적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즈음에 익산미륵사지석탑도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일제가 더이상 훼손을 막는다며 뒷면을 콘크리트를 덮어 놓았지만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전진단을 통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결론이 나면서 해체복원을 하게 된 것이다. 다행이라는 생각보다는 그들이 식민지 나라의 문화재를 얼마나 우선순위에 두었을까. 관심 밖의 문화재는 황량한 벌판에 주인 잃은 돌무더기에 불과했을 만큼 방치되었다. 이렇다보니 부재의 분실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을 것이다.

 흩어진 부재들은 누군가의 처마 밑 마루지방 받침돌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발굴 전에는 탑 주변의 부재들이 무단반출 되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부재들이 어디로 갔을까. 국보11호 미륵사지석탑은 무장 해제된 상태로 외롭게 자리만을 지키고 있는 백제문화의 민낯에 불과했다.

 늦은 감은 있지만 20년에 걸친 보수공사를 끝냈다. 탑을 덮고 있던 가설 덧집이 해체되고 탑의 모습이 공개되었다. 말도 많고 우여곡절을 겪어 다시 태어난 미륵사지석탑, 보수과정의 문제가 감사원의 감사로 지적되었다. 3층 이상 적심부의 부재사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기본설계를 따르지 않은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진행했다는 문화재청의 답변도 나왔다. 그러나 이만큼의 사업을 하면서 복원의 완성을 이루지 못함을 지적하는 이는 없다. 그래서일까. 처음에는 ‘복원’이라는 말이 이제는 ‘수리’라고 한다. 주제어가 바뀌었다.

 수리보다는 복원에 방점을 두었더라면 지금의 모습보다는 훨씬 완성된 결과물로 맞이 할 수 있었다. 그 수고로움이 얼만큼이었는지 짐작은 간다. 탑을 보고 있는 국민들의 마음은 어떨까? “추정해서 복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변명처럼 들린다. 시간도 충분하고 예산이 부족했다면 국민모금이라도 했어야했다. 아쉬움이 앞선다. “미륵사지석탑, 미안해요.” 그래도 박수를 보내야 할 것 같다.

 

 글=박인선 정크아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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