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야인시대(野人時代)』의 상식
다시 읽는 『야인시대(野人時代)』의 상식
  • 송산 송일섭
  • 승인 2019.03.28 17: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며칠 전부터 나는 이환경 소설가의 『야인시대』에 빠져 있었다. 우미관 뒷골목의 주먹황제에서 반공투사로, 그리고 정치인으로 반독재투쟁에 앞장선 야인 김두한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작가는 김두한의 일생을 통하여 통사(通史)의 그물망에서 빠져나간 수난의 한국현대사, 그 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필자는 이 소설 전편 7권을?무협지를 읽는 기분으로 읽었지만, 막상 다 읽은 뒤에는 마음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1950-60대의 일이 지금도 그대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인, 서인으로 갈렸던 조선의 당쟁사가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양태와 방법만 조금 달라졌을 뿐이지 여전히 억지와 궤변이 횡행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리 같을까.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그 암흑의 시대에도 김두한 같은 정치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누구처럼 유학파도 아니고 박사 학위도 받지 않았지만, 그는 ’정치는 상식’이어야 함을 스스로 실천하였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여 출세하는 것은 부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더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며칠 전에는 ‘별장 성접대 의혹’의 주인공이 해외로 달아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런가 하면 반민특위가 국론분열의 원인이라는 천박한 역사인식도 드러내 보였다. 누구보다도 많이 배우고 출세한 사람들이 재판을 거래했다면, 불의 앞에서도 입 다물고 부화뇌동하였다면, 그까짓 배움은 서푼 어치도 안 되는 장식에 불과한 것 아닐까.

이런 사실들은 매번 우리를 절망하게 하였다. 어쩌면 ‘야인시대’만도 못한 퇴행의 역사 앞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버젓이 국정농단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 고리를 끊고자 하는 충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흘러간 옛 노래에 취해서 ‘친비친(親非親’을 가른다. 사람들의 배움이 맹목적일 때는 참으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협객 김두한이 외쳤던 삶과 정치가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는 결코 풀지 못할 어려운 방정식이 아니다. 단순한 상식이다. 그런데 자기 욕심을 채워 넣기에 바쁜 정상배들이 문제를 뒤틀고 꼬아서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 근대사의 불행은 해방 후 친일파들을 척결하지 않은 일이다. 소설가 전광용은 『꺼삐딴 리』 라는 소설을 통하여 그들의 천박한 역사인식 과 허위를 지적한 바 있다. 필자는 역사를 전공한 일도, 그렇다고 이에 대한 폭넓은 교양을 쌓은 바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를 보면 속이 터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김성일의 궤변을 믿었던 선조, 그러나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김성일에게 화를 내며 전쟁 안 난다고 했으니 네가 가서 싸우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오늘날에도 유림의 대표로 만백성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하니, 내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해괴한 진풍경일 뿐이다.

이승만의 영구집권의 길을 만들어준 노 수학자의 사사오입개헌의 이론적 근거. 그 기막힌 논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행태를 답습하여 또 다시 영구집권을 꿈꾼 10월 유신의 음습함. 권력의 단맛에 눈이 어두웠던 배운 자들의 비굴함, 그들의 탐욕이 부끄럽기만 하다.

상식이 없는 정치는 죽은 정치다. 김두한, 그는 배움은 부족했지만, 그의 정치는 상식을 늘 말하고자 하였다. 해방 전에는 일본과 싸우는 민족주먹으로, 해방 후에는 공산당과 싸우는 반공주먹이었지만, 6.25 이후에는 반독재 투쟁을 하면서 상식을 이야기했다. 이 시대의 정치여, 그리고 지성이여, 지금 우리가 꿈꾸고 이야기하는 것이 상식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송산 송일섭 칼럼니스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