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시각적표현
분노의 시각적표현
  • 박인선
  • 승인 2019.03.17 12: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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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5.18관련 故 조비오 사자명예훼손사건 출석요구를 거부하다가 구인장을 발부하겠다는 법원의 으름장 앞에 법정에 출석하는 전두환씨의 모습이 생중계 되었다. 불출석의 사유는 알츠하이머 때문이라고 한다. 일말의 동정심이 생긴다. 기왕, 알츠하이머라고 했으니 그렇게라도 연출을 해야 하는데 액션이 맞지 않아서일까?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왜,이래”라면서 신경질적이다. 알츠하이머의 증상이 초기인지 중기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표면상으로 본다면 ‘유사 알츠하이머’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사람마다 조금씩 증상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으니 달리 그의 증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자동차로 가던 중에 고속도로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하려고 내리는데 누군가가 다급하게 액션을 취하니 깜짝 놀라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순간적으로 차 속으로 몸을 숨긴다. 반사적이고 본능적이다. 알츠하이머는 반사적이지 않고 불균형이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렇지만 알츠하이머라고 하니 어쩌겠는가.

 그에게도 할 말은 많을 것이다. “구국의 일념이었다”,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라면서도 권력을 동원하여 반대자에 대한 온갖 고문과 박해를 거듭하고 초법적 만행을 저질렀다. 그 대가로 반란수괴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불법이 동원된 부정축재에 대한 국가 환수도 진행 중이지만 ‘통장에 29만원 밖에 없다’는 말로 한동안 세간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국민화합차원의 사면 복권이 오늘의 사태를 가져왔다는 여론도 있다.

 5.18의 기억은 잔인하다. 필자는 어릴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를 5.18민주화운동이후 정신적후유증으로 잃게 되었다. 참으로 총명하고 정의로운 친구였다. 부모에게는 효자소리를 들을 만큼 순종적이었다. 대학에서는 독서동아리 활동으로 실천적 삶에 대한 고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참혹함을 목격한 그에게 인내는 한계상황으로 몰려있었다. 투쟁과 도망이 일상이 되었다. 죽음을 택할 만큼의 원망과 분노가 어느 정도였을까?

 노르웨이 표현주의 작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1863~1944)의 ‘절규’가 생각난다. 뭉크의 작품에는 일그러진 모습의 겁에 질린 모습이 표현되었다. 두 손으로 부여잡은 얼굴은 고무풍선을 짓누르듯이 찌그러지고 어찌할 줄 모른다. 불안한 감정을 최고조로 표현하고 있다. 노르웨이 해안의 붉은 빛깔, 울렁거리는 지형들은 음산하기까지 한다. 시대와 삶의 공간은 달랐지만 5.18 당시의 광주시민들의 마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작품처럼 보인다. 친구의 모습이기도 하다.

‘절규’를 보면 광주의 참상이 자연스럽게 연결 된다. 이런 감정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듯 싶다.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분노, 불안, 갈등으로 점철된 감정의 일단들이 작품 속에 나타나있다. 절규를 연작으로 표현하였다면 아마도 머리가 사라진 모습이 아니었을까. 곧 죽음을 암시하는 작품일 것이다.

 5.18을 계기로 숨죽여만 오던 예술계도 서서히 기지개를 펴게 되었다. 사정당국의 감시·감독도 작가들의 표현의지를 꺽지는 못했다. 때로는 전시작품들이 철거되기도 하고 혼돈의 과정은 지속되었다. 시대적 아픔들이 서서히 작품을 통하여 녹아나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밀도있는 분노의 시각적 표현은 다양한 장르를 통하여 기록되어 지는데 그들은 아직도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 벌어지는 5.18에 대한 해묵은 논쟁도 그들에게 씌워진 원죄를 증명하는 이름표에 다름 아니다.

 

 글 = 박인선 정크아트 작가

작품 이미지 설명 :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절규’/ 오슬로국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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