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이 떠오르는 시간
프랑켄슈타인이 떠오르는 시간
  • 송산 송일섭
  • 승인 2019.03.14 16: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극의 갈라진 빙하 속에서 만난 어느 이방인의 이야기다. 화학을 전공했던 그에게 새로운 욕심이 발동했다. 무슨 일이든 다 할 것 같은 자신감에 들뜬 그는 납골소와 신체안치소를 들락거린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었듯이 그 자신 또한 하나의 생명체를 만들고 싶어서다.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체격이 큰 240센티미터의 거인을 만들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뚫고 생명을 만든 창조자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북유럽의 을씨년스럽던 11월의 어느 날, 새벽에 그가 만든 생명체는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뜬다. 큰 키에 균형 잡힌 몸매였지만 축축한 눈과 쭈글쭈글한 피부, 새카만 입술은 섬뜩하기만 했다.

이 이야기는 1818년에 메리 셀리(Mary Shelley)의 장편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나온다. 메리 셀리가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바이런을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바이런이 소름과 두려움, 공포를 자아내는 소설을 써 보라는 권유를 받고 쓴 소설이라 한다. 주인공 프랑켄슈타인 빅터는 특히 생리학 분야에 탁월한 실력을 갖춘 과학자로, 그가 만든 괴물에 숨결을 불어넣어 창조자가 되었지만, 그는 이 일로 말미암아 사랑스런 동생 월리암과 이웃 소녀 제니퍼, 그리고 항상 곁에서 돌봐주던 절친 클로르발, 사랑하는 아내 엘리자베스, 게다가 자신의 굳건한 응원자였던 아버지까지 잃어야 했다.

필자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큰 혼란을 겪어야 했다. 괴물이 횡행함으로써 끝없이 다가드는 공포와 불안이 그렇고,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괴물의 외로움과 절망에 가슴이 아팠다. 모든 피조물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의 뜻대로 세상에 나온 자들이 아니다. 이 소설의 괴물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나왔지만, 그는 세상 사람들과 섞이고 싶었고 또 인정받고 싶었다. 드 라세 가족을 만나면서 새로운 변화를 꿈꾼다. 헛간에 숨어서 그 가족들의 생활과 습관을 익히고, 말과 글도 배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 괴물이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괴물’의 겉모습에서 풍기는 이질감에 극도의 혐오와 공포감을 줄 뿐, 어떤 사람과도 어울리지 못한다. 이에 절망한 괴물은 자신을 외면하는 세상에 대하여 복수를 다짐한다. 특히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들어 놓은 창조자 프랑켄슈타인 빅터에게 복수를 감행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창조자 앞에 나타나서 자신의 마음과 상처를 공감할 수 있는 배우자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사정한다.

이 소설의 제목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든 과학자 빅터의 이름이다. 그가 괴물을 만들어 세상을 공포와 두려움의 도가니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프랑켄슈타인 빅터 또한 괴물과 다름없다. 여기에 이르면 이 소설속의 창조자와 피조물은 동시에 ‘괴물’일 수 있다는 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은 공동의 이름이기도 하다. 단지 창조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은 19세기 초반의 공상과학의 범주에 들지만, 단순히 과학적 진보만을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과 긴밀하게 연결된 타인에 대한 이해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던 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또 그가 만든 ‘괴물’이 패악을 자행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우리가 살면서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는 문제들을 생각하게 한다.

필자는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수많은 프랑켄슈타인을 상상하였다. 걸핏하면 패를 갈라 다투는 모습 속에는 훨씬 더 악랄한 프랑켄슈타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극단의 혐오와 분노는 이 소설의 메시지를 계속 떠올리게 한다. 정치는 양극단에서 표류하면서 분노를 양산하기에 바쁘고, 경제는 빈부의 극단에서 서로 대치하느라 바쁘다. 사실 요즘은 신문 방송을 대하기가 겁이 난다. 우리가 지금 함께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여태껏 살아온 과정에 대하여 함께 성찰하는 과정을 갖지 못했다. 극단의 혐오와 분노만이 세상을 보는 눈이었다. ‘모든 잘못은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인하는 것’이라는 듯 강변(强辯)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며칠 전, 아이들을 볼모삼아 파행을 주도했던 한유총도, 역사를 몰각한 의회의 고성도, 국정농단에 따른 헌법재판소의 판결까지도 부정하는 지도자들의 궤변 속에도 프랑켄슈타인이 웅크리고 있음을 보았다.

진실을 외면하고 상대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 대화나 타협이 없이 자기주장만 강요하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괴물들의 야만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강조되고 강요된다면 괴벨스의 논리처럼 언젠가는 우리가 그들이 만든 거짓의 광장에서 박수를 칠지도 모르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극단의 혐오와 분노를 자극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이런 사회에서는 진실이 왜곡당하기 쉽고, 일방적 주장과 강요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거친 막말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이러다가 우리들이 모두 프랑켄슈타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슬그머니 걱정이 된다.

 

송산 송일섭 칼럼니스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