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남 최초 군산 3.5만세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한강이남 최초 군산 3.5만세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 이복웅
  • 승인 2019.03.06 16: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중의 힘으로 저항했던 3.1기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지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3.1운동 또는 3.1만세운동은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한민족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한일합병의 무효화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이는 일본의 무단통치가 3.1독립운동이라는 결과를 가져 오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 1차대전이 끝나고 개최된 파리 강화회담에서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제안 한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소위 민족 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조선독립의 희망적인 분위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1918년말부터 사전 계획을 세우고 파리강화 회담에 독립의 목소리를 알려야 한다는 김규식의 발언과 1919년 고종의 죽음등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면서 3.1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와 함께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은 고종을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지면서 만세 시위 확산을 가져 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919년 3월1일 오후3시 조선의 민족 대표 33인중 29인이 태화관(서울 인사동소재)에 모여 역사적인 조선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그 시간 탑골공원에서도 경신학교 출신인 정재용이 독립선언문을 낭독 했다 거사 시간을 약속하지않고 모인 학생이 1000여명이 넘었고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만세소리가 울려 펴졌다 이때 성안과 지방의 민중들도 합세하여 수십만 군중이 참여 하였다 3.1만세운동은 독립선언을 기점으로 탑골공원에 이어 1919년 3월3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군중들이 모여 들었다 당시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은 50만명이 넘었다

 3.1운동의 비폭력 항쟁은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46만3086명이었다 이는 1919년3월 당시 조선의 인구는 1678만 8천400여명으로 전체인구 36%에 달하는 인원이었으며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하고 1200명이 체포되었다 전국적인 시위는 천안의 아우네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불과 수 개월만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으며 일본과 연해주 등에서도 이어저 1년동안 계속되었다 임종국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60일동안 1214회의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고 기록 하고 있다 만세운동은 〈천안 아우네 만세운동〉, 〈평남 강서군 사천장터 시위〉,〈만주 용정 만세운동〉,〈군산 3.5만세운동〉,〈익산 이리장날 만세운동〉등 전국 곳곳에서 일어 났다

 3월1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군산의 3.5만세 운동은 전북 군산의 영명학교를 졸업한 세브란스의전 학생인 김병수가 1919년 2월28일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이갑성(세브란스병원직원)과 접촉하여 독립선언문 200장을 건내 받고 군산으로 내려와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박연세,송헌옥,고석주,김수영에게 전해졌다 독립선언문을 전달받은 그들은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문 3천5백장과 태극기 수백장을 만들고 3월6일 서래장날에 거사 하기로 결의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군산경찰서는 3월4일 새벽 무장경찰을 동원 박연세,이두열 두 선생를 연행 구금한다 이에 김수영,고석주선생을 중심으로 학생간부와 회의를 열고 이날 오후 6시 교사와 학생 70명은 군산경찰서 앞에서 연행교사 석방과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으며 그중 30명을 연행했다 (이 시위는 전북최초의 만세운동이 된다) 이에 격분한 영명학교사와 학생,예수병원직원,구암교회교인,일반인들은 3월6일 시위 일정를 하루 앞 당기고 3월5일 정오에 150여명이 모여 시내로 진입하여 설애장터를 지날 무렵 시위대는 500여명으로 불어나 군산경찰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 소리를 외쳤다 이날 시위군중 검거는 90여명에 달했으며 그중 63명은 구속 송치하였던 만세운동이다 당시 군산지방은 3.5만세운동을 기점으로 군산공립보통학교 방화 항일운동,옥구대야항일운동,임피장터만세운동등에서 일어났으며 이러한 사건으로 사망 53명,실종 73명,부상 195명이나 되었다 3.1 만세운동으로 인한 사상자로서는 전북도내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전국적으로 3.1운동 이후 3개월간에 걸친 만세운동은 통계에 의하면 202만3,089명이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시위 횟수는 1,542회,사망자 7,509명,부상자 15,961명 체포자 46,948명 이였으며 불탄 민가715호,교회4곳,학교22개교 였다 이러한 3.1독립 만세운동의 영향으로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여 근대 국민국가 수립운동이 첫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한강 이남 최초의 군산3.5만세운동이 일어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를 즈음하여 3,5만세운동의 자주적 주권의식를 되색기고 이를 토대로 통일로 이어지는 도민적 결의가 요구 되는 때이기도 하다.

이복웅 / 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