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
[이달의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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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04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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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선생은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원(청주)에서 출생하여 1882년 동학에 입문하였다. 그리하여 동학 제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 밑에서 종교적 수양을 닦으며 이후 동학을 이끌어갈 역량을 길러갔다.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3세 교조로 취임하여 교세확장에 힘을 기울이던 그는 1901년에는 세계정세의 변화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의 경험은 선생으로 하여금 종래 동학농민혁명에서 보여주었던 항일적 무력항쟁의 노선에서 일본을 통한 문명개화운동의 노선으로 방략을 변경하는 기점이 되었다.

선생은 보성사(普成社)라는 출판사를 세우고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를 발행하여 교인을 계몽시키는 한편 『만세보』와 각종 서적을 발간하여 일반인의 계몽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선생은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한 문창·보창·명신·양영 등 수십개의 남녀학교를 인수 또는 신설하여 운영함으로써 민족의 동량을 육성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발맞추어, 대량살상과 대량파괴의 기존 문명을 비판하고 이상적 인류사회를 만들려는 개조사상이 유행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주창에 따라 식민지의 해방 움직임이 있자, 선생은 우리 민족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모색하였다.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독립에 대한 열망을 알리고자 하였다.

손병희 선생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과 3·1독립운동의 골간이 된 대중화(大衆化)·일원화(一元化)·비폭력화(非暴力化)의 3대원칙에 합의하고 각 교계의 중심인사들을 규합해 갔다. 천도교의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에서 2만 1천여매(3만 5천매라는 학설도 있음)의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다. 이어 기독교의 함태영과 이갑성, 천도교의 이종일, 불교의 한용운 등을 통해 각 종교의 전달자에게 전해졌고, 이들을 통해 전국 각지로의 배포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거사일인 3월 1일, 선생은 태화관에 모인 28인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선언식을 마친 후 일경에 연락하여 자진 체포되었다. 그렇지만 선생과 다른 민족대표가 점화한 3·1운동은 이후 요원의 불길처럼 국내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중국·러시아·미국 등 한국인이 살고 있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뇌출혈로 가출옥하였으나 1922년 5월 19일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선생의 나이 62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전북동부보훈지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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