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포 분다, 밥 먹고 놀자
오포 분다, 밥 먹고 놀자
  • 이문수
  • 승인 2019.03.04 17: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필자는 촌놈이다. 정읍에서 6km 떨어진 조월(照月), 우리말로는 ‘달빛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산과 들에서 똥개를 쓰다듬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동네에서 논두렁을 따라 20여 분 걸어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는 정미소, 이발소, 상회, 지서가 있는 도시(?)였다. 지서에서는 매일 정오에 사이렌이 울렸다. 그 소리가 끝나는 순간이 정오를 알리는 시각이다. 동무들은 “오포 분다. 밥 먹고 놀자”라고 하면서 각자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사이렌 소리를 어른들이 오포라 부르니까, 의심 없이 오포라고 했다.

 이 오포제도는 영국이 자국의 식민지에서 오포(午包)라는 대포를 설치하고 정오에 대포를 한 방 쏘아 시간을 알려주었다. 명목상으로는 시계가 없는 식민들에 시간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내밀한 속내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대포를 쏘아 피지배 민족에게 지배자의 힘을 각인시키는 고도의 심리적 지배 수단이다. 1910년 군산 수덕산 북쪽 너머에 부청과 등대 감시소 사이에서는 매일 오포를 쏘았다.

 군산은 조계지로 1899년 5월 1일 개항했고, 이때 조계지 총 면적은 572,000m²(약 17만 3천 평)으로 해망동, 영화동, 장미동, 중앙로 1가 지역이다. 그중 산지를 뺀 주거 용지는 336,669m²(약 10만 2천 평)이다. 조계지란 거류지, 개항장, 주거지 등으로 분류되는데 19세기 서구 열강이 동양을 무력으로 개항시킬 때 그들의 이주민이 약소국 특정 지역에서 치외법권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정해 놓은 곳을 말한다. 개항은 조선 경제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문호를 개방했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이 조선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고 식민 지배를 앞당기게 했다.

 1934년은 군산항을 개항한 지 35년을 맞는 해였다. 그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된 쌀의 양이 200만 석을 돌파한 해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농사지은 쌀의 반을 일본에 빼앗긴 조선인은 배고픈 설움과 굶주림으로 죽어야 했으며, 만주에서 수입한 깻묵과 콩 등으로 목숨을 연명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밥은 하늘이다. 쌀밥 한 번 배불리 먹어보고 죽는 게 소원인 민중들이 이 땅에는 수없이 많았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사회상을 풍자적으로 그려낸 소설인 백릉 채만식의 <탁류>를 보면, 미두장에서 재산을 탕진한 후 절치기 꾼으로 살아가는 정주사와 그의 딸 초봉의 삶을 통해 일본인이 누린 풍요로움 뒤편에서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미두장 주변 사람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초봉의 기구한 삶을 통해 혼탁한 세상을 꼬집는 작품이다. 당시 조선인 소작인들은 쌀 수확량의 50~70%를 소작료로 내야만 했다. 1924년에 전북 농민의 2/3가 소작인 신분이었고, 그중에서도 일본인 농장이 집중된 군산 옥구 지방에는 80% 이상이 노예 같은 소작인이었다.

 1919년, 군산에서는 일본인이 6,809명 조선인이 6,581명이 거주했다. 조선인보다 일본인이 더 많이 사는 도시. 억압과 착취 속에서 반일 감정이 임계점에 달한 군산에서 호남지역 최초로 3·1운동의 불씨를 댕긴 것이다.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생이었던 김병수는 2월 28일 독립선언서 200장을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 박연세, 송현호, 고석주, 김수영 등에게 전했다. 3월 5일 구속된 선생님들의 석방을 주장하며 군산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불렀는데 이것이 전북 최초의 만세운동이다.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가 주동해서 100여 명으로 시작한 시위는 보통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500여 명으로 늘어나 기세를 올렸다. 군산에서는 3월부터 5월까지 21회 만세운동에 25,800명이 참여했다. 3·1운동 당시 군산에 거주한 조선인이 6,581명인 것을 고려하면 1인당 4~5번씩 만세운동에 동참한 것이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군산 개항 120주년을 맞는 해이다. 군산은 골목을 나서면 역사의 한파가 남긴 아프고 슬픈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 흔적들은 현재의 시간과 맞물려 있다. 반식민지 운동을 이끈 베트남 혁명가 호찌민은 “용서하라. 하지만 잊지 마라”고 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이문수<전북도립미술관 학예실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