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과면에서 시작된 남원의 3.1운동
덕과면에서 시작된 남원의 3.1운동
  • 이종호 기자
  • 승인 2019.02.17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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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별기획 1부 끝

 덕과면은 남원군의 서북쪽에 위치해 3.1운동 초기부터 항일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와 인접해있다.

 따라서 3.1운동에 관한 연락이나 선언서가 오수를 통해 전달됐다는 것과 남원군 3.1운동에서 크게 기세를 올렸던 곳이 덕과면이었다는 것은 그 지리적 관계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기미년 3월2일 서울에서 온 독립선언서가 오수리에 거주하는 천도교 전도사 이기동에 의해 새벽 4시경 덕과면 사울리에 있는 천도교도인 이기원, 황석현, 황동주에게 처음 전파됐다.

 이기원은 독립선원서 40장을 전달받아 남원읍 금리에 있는 천도교구로 찾아가 교구장 유태홍에게 전달했다. 또 교인 유석·김성재 등 8명으로 하여금 독립 선언서를 군내 각 마을에 배포하도록 협조를 구했다.

 황석현은 이기동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를 보절면의 천도교인 김덕인과 함께 그날 밤 보절면사무소와 헌병 분견대 앞 게시판에 부착하였고, 황동주는 사매면의 천도교인 문경록과 함께 야음을 틈타 면의 곳곳에 붙임으로써 면민들로 하여금 3·1운동의 거족적인 의의를 주지시켰다.

 그러나 당시 남원읍에는 헌병분견소, 주재소가 각처에 배치돼 있어 일제 관헌들의 엄한 경계와 감시로 집단적인 거사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3월을 넘기고 말아 뜻있는 지방 인사들이 개탄하며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원래 전주이씨의 집안으로 평소부터 항일운동 애국정신을 품고 있던 덕과면장 이석기는 일제하의 면장직을 부끄럽게 여기던 차에, 이 기회에 구국을 위한 독립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결심했다.

 그는 재종제, 이성기, 면직원 조동선 등 몇몇 유지들과 의사를 통해 오던 중 4.3식수기념일을 기해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일제 관청에서 연례적 행사일이니 많은 사람들을 의심없이 집합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석기 등은 3월 31일 주장회의 석상을 통해 각호로부터 반드시 1명씩을 출동해 석양리 뒷산 도화곡에 집결을 지시했다.

 이석기는 집에서 비밀리 각 면장에게 만세운동취지서와 경고 “아! 동포제군”이란 격문을 작성해 20여장씩 복사했다.

 또 오수보통학교에 교사로 재직 중인 조카 이광수를 불러 상의하며 은밀히 만세운동 준비에 들어갔다. 격문의 초안과 군내 각 면의 면장에게 보낼 호소문을 작성하고, 면내 구장회의를 주재하는 등 1919년 4월 3일 식목일을 기해 덕과면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했다.

 3월 31일 밤에는 이석기 사랑방에서 이형기·이성기·이두기·이범수와 함께 사매면에서의 만세운동도 계획하였다. 4월 3일 도화곡에는 면민 800여명이 집합해 유례없는 식수행사의 대성황을 이뤘다.

 이날 이석기는 각 면사무소에 보내는 공문이라고 하면서 만세운동 참가 취지서를 봉대에 넣어 사환 김광삼을 시켜 각 면장에게 발송했다.

 이날 이석기는 군중 앞으로 나서며 큰 소리로 “우리 조선 국민도 독립을 해야 하지 않는가”하니 모두가 손을 들고 희망한다고 외쳤다.

 이석기의 선창으로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500여 군중이 사매면 헌병주재소로 진출했다. 같은 시각에 사매면민들도 이에 합류해 시위 면민은 800여 명이 되었다.

 사울리에서 이석기는 길가 오백룡의 집 지붕위에 올라 ‘경고 아! 동포제군’이라는 제목으로 된 격문을 소리높여 낭독하며 20여장의 격문을 살포했다.

 사매면 헌병주재소는 군중을 해산시키지 못하자 남원헌병대에 연락해 오후 6시경 10여 명의 헌병들이 무장하고 달려와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결국 이석기 면장을 비롯한 조동선·이재화·김선량·이풍기·이승순 등이 체포되고, 면민들은 일단 해산했다.

 시위 현장에서 방극용이 흉탄에 맞아 희생되었고, 주생면의 방진형 방양규·방제환, 남원읍의 방명숙, 김공록 등 8명이 순절했다.

 사매면의 정한익, 왕정리의 황찬서, 동충리의 이일남 등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석기·조동진·이풍기·이승순 등 4명은 광주지법 남원지청에서 1년 반씩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날 덕과면의 만세운동은 남원 군민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면장 이석기의 독립만세 취지가 각 면에 전달되고 만세소리가 현역 면장의 선도로 크게 울려 퍼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일반 군민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남원읍 장은 남원군은 물론 순창, 임실군과 전남의 구례, 곡성 일부 지역의 물화도 거래되던 전라남북도에서 거래가 많기로 유명한 큰 장이었다.

 이성기·이두기·이범수·장경서 등은 4월 4일 남원 장날에 다시 궐기할 것을 결의하고 재차 시위 준비에 착수했다.

 4월 4일 남원 시장 안에 수천 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었고, 오후 2시경 이두기의 만세 선창으로 군중들은 총궐기했다.

 긴 푸른 대에 게양한 태극기를 선두로 일동은 만세를 부르며 남문 쪽을 향해 행진을 개시하고 시장안 수천명의 남녀 군중들이 호응해 만세를 부르고 환호성을 울렸다.

 기독교인들은 작은 태극기를 나눠주고 천도교인들은 등사한 선언서를 배포하니 시장 안, 온 읍내 주변이 어느 사이 독립만세의 환호성으로 진동하고 태극기의 대열로 누비게 됐다.

 일부 광한루 광장에 모인 군중도 같은 시각에 시위를 벌였다. 이에 증파된 헌병대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길바닥은 피가 흘러 물들었다. 손에 촌철조차 없던 민중대열은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호성은 비명으로, 부근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수십 명이 총탄을 맞아 죽거나 다쳤고 20명이 검속됐다.

 일본이 무력탄압에도 남원 군민들의 평화적 애국운동과 끈기 있는 구국활동은 만중 생활 속에 파고들었다.

 만세운동 후에도 청년 박정석, 박권영 등은 남원, 전주 등지를 왕래하며 친일운동의 중지와 독립운동의 지원을 요청하는 격서를 각 유지들에게 발송하고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구국운동을 계속하다가 경찰에 검속돼 각각 7년, 5년의 징역형을 당했다.

 또 만세운동에서 순절한 사람들을 독립운동의 대표적 희생자로 받들어 각 마을에서 장례비를 모아 성대한 장례식을 준비하고 명정에는 義勇之柩(의용지구)라 쓰고 의연금을 모아 유족들을 구호했다. 

 
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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