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살인, 정신장애 그리고 인술
진료실 살인, 정신장애 그리고 인술
  • 김형준
  • 승인 2019.01.07 18: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과대학에서 정신과 첫 수업을 받던 날, 나이 지긋한 교수님께서 자신의 진료실과 연구실 책상 옆에 테니스 라켓이나 골프채를 손 잘 닿은 곳에 놓아두고 있다면서 골프와 테니스는 전혀 못 하지만 환자가 공격할 때 방어용으로 놓아둔 것이라는 말을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하셔서 농담인 줄 알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의사가 되고 정신과를 전공하면서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새삼 깨달은 때가 많다. 또 다른 편견을 만들 것 같아 매우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정신과 환자 중에는 분명히 폭력적인 문제를 가진 분들이 있다. 정신의학에서 다루는 병들은 사람의 생각, 기분, 인지력, 그리고 행동 등의 문제를 가진 경우를 말하는 데 행동장애 중에서 가장 심각하고 위험한 것이 자신과 타인에 대한 공격행동인 것이다. 정신과 진료실에는 경찰에 의해 수갑을 차거나 가족들에 의해 묶어서 오는 환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래서 환자의 면담과 진료를 하면서 환자의 폭력성을 평가하고 대비를 하는 것은 정신과 수련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얼마 전 강북삼성병원에서 진료하던 故임세원교수가 환자의 칼에 찔려 사망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필자도 학회 등에서 고인의 강연을 들은 적도 있고 또한 전국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자살예방교육의 지침서로 널리 활용되는 ‘보고, 듣고, 말하기’ 프로그램의 개발자로서 평소 존경하던 동료의사라 뉴스를 통해 소식을 듣고 남 일 같지 않아 큰 충격을 받았다. 故임세원 교수는 전공의 시절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던 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계기로 자살에 대해서 관심을 뒀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임 교수는 자살 징후 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나섰고 앞서 말한 한국형 표준 자살예방교육 프로그램인 ‘보고 듣고 말하기’를 개발, 현재 보건복지부와 국방부 등에서 자살예방을 위한 정식 교재로 쓰이고 있다. 고인은 허리를 다쳐 심한 통증이 치료에도 호전이 없는 상태를 경험하고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우울증을 스스로 경험하게 되었고, 비로소 환자의 진짜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며 그 경험을 살려 환자들을 마음으로 다가가던 따뜻한 의사로 동료 정신과 의사들 사이에서도 인성과 실력 모두 갖춘 분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고인의 빈소에는 수많은 환자와 그 가족들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조문을 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번 사건을 계기로 조금은 위험한 여론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조현병이나 조울병 등 중증 정신장애 환자를 격리하거나 처벌을 강화해달라는 국민청원이 수십 개가 올라오고, 정신장애자에 대한 혐오 발언이나 근거 없는 주장들이 SNS나 인터넷에서 언급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주목해 볼 것은 故임교수 유족들의 너무도 존경스럽고 품격 있는 호소이다. 누구보다 든든하고 자랑스러웠을 가족의 죽음 앞에 그들은 누구를 원망하기보다 평소 고인의 뜻이었다며 그의 죽음이 환자의 생명과 고통을 다루는 의료진뿐만 아니라 위험이 있는 곳에서 일하는 모든 분들의 안전을 살피는 계기가 되기를 호소하는 한편, 특히 정신장애로 마음의 고통을 받는 정신과 환자들이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 없이, 누구나 쉽게, 정신적 치료와 사회적 지원을 받기를 원한다는 호소를 하였다고 한다.

 최근 들어 조현병 혹은 기타 정신질환에 의한 강력 범죄에 대한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더욱이 이번 사건으로 정신장애 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지나친 인식과 편견이 확산하고 있어 정신장애 환자를 돌보는 일을 업으로 하는 의사로서 안타까운 상황이 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왜 최근 정신장애 환자의 범죄에 대한 뉴스가 늘어나는 것일까? 묻지마식 형태로 나타나는 정신장애 환자의 범죄라는 선정성과 화제성도 큰 원인이겠지만, 또 다른 원인으로 작년 개정된 정신건강복지법(舊정신건강증진법)도 한 원인이라고 많은 정신과 전문의들은 판단하고 있다. 한마디로 입원을 까다롭게 하고, 장기 입원을 입원료 삭감을 통해 탈원화를 유도하면서 인권을 보장하겠다는 방안이나 무리한 개정으로 입원치료가 필요함에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가 늘어나고 있고, 떠밀려 퇴원한 환자들에 대한 체계적인 사후 관리와 치료를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중증 정신장애 환자에 대한 전문적인 관리 서비스가 필요함에도 현실은 관리의 책임은 오로지 가족들의 부담으로만 되어 있으나, 입원은 어렵고 돌보기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노출된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다. 요즘처럼 가족의 기능이 해체되고 있는 세태에서 가족들로만 중증 정신장애 환자를 관리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지역사회에서 중증 정신질환을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정신건강복지센터의 환자 수용률은 불과 4%일 뿐이다. 문제는 예산도, 인력도, 정부의 인식도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수를 차지하는 의료급여(기초수급대상자) 정신장애 환자들은 건강보험 환자보다 60% 정도의 낮은 수가만을 보장하며 정부 스스로 노골적인 차별을 하고 있다. 결론은 이들에 대해 제대로 된 약과 치료를 제공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을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신장애 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보다는 고인과 유족들의 뜻처럼 차별 없이 좀 더 쉽게 그들이 제대로 된 치료와 사후 관리를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김형준<의료법인 지석의료재단 효병원 진료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