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담화를 인내할 수 없었던 왕이 초래한 어떤 피바람
뒷담화를 인내할 수 없었던 왕이 초래한 어떤 피바람
  • 장상록
  • 승인 2019.01.0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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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조선 사대부 사회에 참혹한 피바람을 불러온 그는 전주 사람으로 처가가 금구였다. 지금도 호남에 대한 지역폄하 논리의 근거를 찾는 일부 사람들에게 신의가 없는 대표적 인물로 거론된다. 율곡의 추천을 받아 등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율곡 사후 그를 비난하는 대열에 섰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평가와는 별개로 한 사람의 인성을 가지고 지역 전체에 대해 주홍글씨를 새기겠다는 발상의 수준은 기억해둘 만하다.

그렇다면 기축옥사는 어떤 사건인가? 먼저 희생된 선비의 수가 놀랍다. 폭군이라는 연산군(燕山君) 시대의 무오사화나 갑자사화도 기축옥사와 비교하면 작은 해프닝에 불과할 정도다.

정확한 수에 이론은 있지만 약 1천명이 희생되었다는 정여립 역모사건은 실체가 모호했다. 그나마 이 사건에 대한 실루엣을 어렴풋이나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건 처리과정에서 실체적 진실에 가장 근접했던 이항복의 평가다.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구체적 역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런 의구심을 받는 일련의 행위들이 실체로 규정되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생긴 것일까?

이때 희생된 대표인물이 이발(李潑)이다. 그는 이 사건으로 멸문지화를 당한다. 이때의 참상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다. 무릎에 큰 돌을 얹는 압슬형을 당한 이발의 막내아들은 나이가 겨우 여덟 살이었고 고문을 당한 늙은 노모는 여든 두 살이었다. 심문하던 우의정 이양원이 왕에게 어린이와 노인은 고문할 수 없다고 했지만 선조(宣祖)는 그 말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이발 자신은 물론 어린 아들과 노모를 포함한 가족 모두 고문으로 죽게 된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이 참혹한 시기에 보여준 한 사람의 빛나는 의로움이었다. 후일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서 전사했을 뿐 아니라 문묘에도 배향된 조헌(趙憲)이 주인공이다.

그는 소식을 듣고 옥천에서 올라와 끌려가던 이발의 노모 윤씨를 만난다. 그 자리에서 조헌은 윤씨에게 술을 따라주고는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가죽옷을 건넨다. 이에 윤씨가 “죽어서 아들을 지하에서 만나면 이 일을 말해 주겠다.” 하자 서로 바라보고 통곡하면서 헤어졌다.

이후로도 조헌은 이발 집안일을 언급할 때마다 오열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조헌의 우정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그가 친구 이발이 정여립과 절친한 것을 질책하면서 절교했던 사이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모두가 외면할 때 옛 친구의 의리를 잊지 않았던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의병장이자 문묘에 배향된 동방 18현으로 부족함이 없는 성현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왕인 선조는 왜 이토록 잔인했을까? 그것에 대한 유력한 추론 하나는 그의 콤플렉스다. 선조는 정상적이라면 왕이 될 수 없었다. 명종(明宗)이 후계자 없이 죽게되자 방계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중종(中宗)의 서손인 그에겐 이전 왕들에 비해 정통성이 취약했다. 그가 의심이 많고 당시 조선사회에서 그 어떤 신하들보다 최고의 정치적 수완을 가지게 된 것은 그런 태생적 배경이 중요하게 자리한다. 그런 그에게 이발은 역린을 건드린 인물이었다.

정여립이 진안 죽도에서 자살한 후 조정에서는 그의 아들은 물론 주변인물에 대한 심문과 함께 정여립의 집을 수색한다. 이때 다량의 편지와 문서가 나오는데 이른바 적가문서(賊家文書)였다. 그 중엔 이발이 정여립과 주고받은 편지도 있었다. 문제는 편지의 내용 중에 왕인 선조에 대한 뒷담화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발이 만일 “안 보이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할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들키지 않았을 때 용인되는 것임을 알았어야 했다.

다산과 추사, 단테와 페트라르카는 부자지간 정도의 나이차였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과 존중은 없었다. 위인이라고 모든 사람에게 존중받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국왕 선조가 기축옥사에서 보여준 행태는 대단히 실망스럽다. 선조는 국왕의 직업윤리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왕에게 개인적 원수는 없다.”

장상록<예산군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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