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에 생각해 보는 세 가지 의무
기해년에 생각해 보는 세 가지 의무
  • 송일섭
  • 승인 2019.01.03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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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마르셀 모스(Marcel Mauss)는 인간을 ‘호혜성의 개념’으로 파악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세 가지 의무를 진다고 했다. 그것은 ‘주어야 할 의무’, ‘받아야 할 의무’, ‘다시 되갚아야할 의무’다. 우리가 살면서 이 세 가지 의무를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 성공한 인생이 되기도 하고 실패한 인생이 되기도 할 것이다. 결코 낯설거나 생소한 말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은 의무의 연속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세 가지 의무를 완벽하게 완수한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인류학자로서 사람들의 삶에 깊이 천착해 온 마르셀 모스(Marcel Mauss)는 새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웠다.

북아메리카의 서해안 벤쿠버만 인근에 사는 콰키우틀족의 이야기다. 하류 지역에 사는 콰키우틀족은 대체로 부유했다. 하류 지역의 비옥한 퇴적층에서는 농작물이 충분히 경작되었고, 게다가 인근 바다의 해산물까지 풍부하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가 하면 해안에서 조금만 내륙으로 들어가면 영 딴판이었다. 그 지역 부족들은 매우 열악했다. 이들 부족사회에는 빈부격차가 극심했고, 이것 때문에 걸핏하면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부족사회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이 부족들이 새롭게 고안한 행사가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 “재화 덜어내기 축제”이다.

재화의 많고 적음에서 오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콰키우틀족은 질펀한 축제를 열었다는 것이다. 이 축제는 얼핏 보면 있는 자들이 벌이는 야만적인 과시행위처럼 비춰졌지만, 그 이면에는 나눔과 배려가 담겨 있었다. 가난한 부족들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의 마음을 채워주는 축제를 한 것이다. 축제가 끝나면 그 혼란스럽던 부족관계가 자연스럽게 원만해지고 안정적인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즉 이곳의 부자들은 재화를 창고에 쌓아놓고 부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들에게 베풀면서 과시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부자들은 더욱 존경받게 되었고, 열심히 일하면 누구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 것이다.

참 놀라운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모두가 부자가 되려고 난리 속이다. 철옹성 같은 부의 장막을 쌓고 그 안에 안주하면서 성 밖 사람들을 무시한다. 최근 잇따른 대기업의 갑질이 바로 그것이다. 유통 분야의 횡포를 보면 숨이 막힌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등의 불공정행위는 영세업자들의 목을 움켜쥔다. 자신들은 돈방석 위에 앉아 있지만, 영세 상인들은 아르바이트생들의 최저임금 몇 푼 올리니까 더 손을 놓고 말았다.

깨끗하고 반듯한 일은 자신들이 하고 위험한 일은 영세업자들에게 내맡긴 ‘위험의 외주화’는 또 어떠한가. 2016년의 구의역스크린도어 사건, 최근 서부발전의 태안발전소 김용균 씨의 사망사고에서 보듯 인간에 대한 배려는 어디에도 없고 돈 버는 데에서는 그 간악함이 끝을 모른다. 자신의 사업장에서 힘없는 노동자들이 해마다 죽어가는 데도, 무재해업소라며 보험금을 타 먹었다는 이야기는 차라리 못들은 걸로 하자.

또 교육은 어떠한가. 옛날에는 ‘개천에서 용(龍) 나는 신화’가 우리나라 산천에 가득했다.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한바탕 신명나는 날을 기다리며 살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법시험마저 없애버리고 1년에 수천만 원씩 드는 로스쿨 비용을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기울어진 운동장 밑바닥에서 주춤거리는 아이들을 바르게 세워줄 장치가 없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기해년은 황금 돼지해라고 방송마다 요란하다. 모든 국민들이 황금돼지의 희망을 가질 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우리에게는 쾨키우틀족의 부자들 같은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일까. 이미 가진 자에게, 권력을 쥔 자들게만 주어진 꿈이라면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가혹한 시련이 될 것이다. 마르셀 모스가 밝힌 인간의 세 가지 의무를 다시 생각할 때다. 이 땅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국민들에게 ‘주어야 할 의무’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KBS <인간극장>에서 100세가 된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기도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자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게’ 해달라는 그의 간절한 기도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의 기도 속에는 ‘되갚아야 할 의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송일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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