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디 머큐리와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현대미술과 예술의 죽음
프레디 머큐리와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현대미술과 예술의 죽음
  • 이태호
  • 승인 2019.01.02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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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광풍을 불러일으킨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지금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화제의 영화이다. 영국의 록그룹 퀸(Queen)의 보컬이었던 프레디 머큐리의 삶과 실험적이었던 음악세계를 조명한 이 영화는 무엇보다 ‘퀸’의 주옥같은 노래 20곡을 자세히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감동에 빠지게 된다. 특히 후반부 25분을 통째로 할애한 ‘라이브 에이드’ 콘서트 장면은 압권이라 할 수 있고 한국에서는 본국(本國)인 영국의 관객 숫자를 넘어 이제 곧 1,000만을 넘어설 것으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드라마틱한 굴곡진 삶으로 점철되어 결국에는 비극으로 종결된 45세의 젊은 나이에 단명했던 프레드 머큐리의 일생은 37의 젊은 나이에 결국에는 자살을 선택해야만 했던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음악과 미술, 팝과 예술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넘어, 천재적인 예술성을 가진 전설이었고, 대체 불가능한 아티스트였다.

 현대미술은 다양한 매체의 확장과 장르의 해체, 주제의 다양성 등으로 인하여 ‘다원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도래’라는 외적 요인 이외에도 개성적인 세대의 탄생과 키치, 새로운 미디어의 사용을 통한 다양한 창조 욕구, 전통적인 진리와 이론들에 대한 해체 등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현대미술 역시 사회문화의 다른 측면들과 같이 그 형태가 과거와는 많이 다른 변화의 도전을 받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위협적일 정도의 급속한 진행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 속에서 유독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있어 미술작품에 내재하여 있는 의미의 깊이는 더욱더 난해해 보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가끔 우리에게, 이 모든 진행과정이 끝났을 때 그 결과물들을 우리가 ‘과연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될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면서 ‘예술의 죽음’, ‘예술의 종말’이라는 단어를 상기하게 한다.

 아더 단토(Arthur Danto)가 주장했던 ‘예술의 죽음’은 헤겔(Hegel)이 예술의 가장 높은 가치로 간주했던 ‘예술을 위한 예술’이 죽었음을 알리는 전주곡이 되었다. 예술의 죽음이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예술의 진정한 의미와 예술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오늘날 예술이라는 미명(美名) 하에 그럴싸하게 포장되고 작품의 주제가 아이디어가 되어서 기호화되고 있다. 수많은 작품이 세계를 자극하려는 과정 속에서, 특히 현대에 들어오면서 예술의 의미는 한없이 가벼워져서 작품은 생각의 이미지들을 나타내 주는 하나의 장식적인 도구로서 그 역할이 축소되어가고 있다. 예술이 이렇게 작가의 생각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장식적인 도구로 전락해버릴 때, 예술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와 일반인의 변기, 앤디 워홀의 박스와 일반 상점의 박스가 다른 것은 그 속에 작가의 철학적인 사고와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작품 속에는 작가의 철학적 사고가 담겨 있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관객의 정신과 영혼에도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

 관객과 예술과의 단절 역시 예술의 죽음을 몰고 온다. 모든 분야의 예술가들은 관객과 서로 소통하기 위하여 작품을 제작한다. 서로 소통하지 않은 작품은 아무런 논쟁 없이 존재할 뿐이며, 이런 작품들은 서로 갈등을 일으킬 여지가 없기 때문에 서로 무시하게 된다. 예술가 중에서 미술가들이 유독 외롭고 고독해 보인다. 왜냐하면 작업의 특성상 음악이나 연극, 무용처럼 집단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미술가들은 주로 개인 화실에서, 그것도 혼자서 작품 활동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다른 어느 예술분야보다도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모든 인간 활동은 소통을 위한 활동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작가들 역시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개인적인 성취감이나 만족감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과 교감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현대예술에서는 작품의 의미에 결정적인 주체가 더 이상 작가가 아니라 관객이라는 것을 명심해야만 한다. 소통하지 않은 작품은 결국 죽은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인터넷과 같은 매체의 발달이 정보의 제공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오히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정보만을 일방적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예술에 대한 무관심을 유발하게 된다. 예술의 죽음과 다름없는 ‘예술에 대한 무관심은’ 역설적으로 모든 범주를 수용하게 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작품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것들조차도 교묘하게 예술의 영역 속으로 침투하게 되며, 이런 과정에서 무늬만 예술가인 ‘가짜 예술가’ 역시 탄생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위예술에 대한 논란조차 없다. 왜냐하면 전위예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태호<미술평론가/익산문화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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