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시 당선작 ‘명옥헌 별자리’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명옥헌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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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1.01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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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명옥헌 별자리

 

   원림에 드니 그늘까지 붉다
 명옥헌*을 따라 운행하는 배롱나무는
 별자리보다도 뜨거워
 눈이 타들어가는 붉은 계절을 완성한다
 은하수 쏟아져 내리는 연못 속 꽃그늘
 그 그늘 안에서는 무엇이든 옥구슬 소리로 흘러가고
 어디선가 시작된 바람은 낮은 파문으로 돌아와
 우주의 눈물로 화들짝 여울져 가는데,
 기어이 후두둑 흐드러지는 자미성(紫微星)*
 연못 속으로 어느 인연이 자맥질 해 들어왔나
 문이란 문 죄다 열어젖히고
 한여름 염천에 백리까지 향기를 몰아간다
 그 지극함으로 꽃은 피고지는 것
 제 그림자를 그윽히 들여다보며
 아무도 본 적 없는 첫 개화의 우주에서
 명옥헌 별자리들의 황홀한 궤도가 한창이다
 한 생을 달려와 뜨겁게 피어나는 배롱나무
 드디어 아무 망설임 없이 안과 밖을 당기니
 활짝 열고 맞아들이는 견고한 합일의 연못
 눈물겹게, 붉다
 
 명옥헌(鳴玉軒): 전남 당양군 소재. 조선중기 오이정이 세움.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옥구슬소리 같다하여 명옥헌이라 함

 자미성(紫微星): 자미는 백일홍나무, 배롱나무라고도 하며 하늘의 은하수를 본따 명옥헌 연못 주위에 28그루의 배롱나무를 심었다고 함.

 

▲ 최재영 씨 당선 소감

올 한 해를 너무 무기력하게 보내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 무렵 예쁜 목소리의 기자님으로부터 당선소식을 전해 받았습니다. 기쁜 마음과 가벼운 떨림이 공존합니다. 직장인으로서 바쁘게 보내는 일상 중에 시를 쓰고 그 시로 당선이 되어 더욱 기쁜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동안 몇몇의 당선소감을 쓰기도 했으나 신춘문예의 당선소감을 쓰는 일은 언제나 매혹에 가깝습니다. 내 생애 내면의 수많은 격돌과 사색과 반문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이들로 하여 나는 살아가고 고뇌하고 슬퍼하고 증오합니다. “시”를 쓰는, 너무나도 위대하지만 조사 하나, 혹은 행의 구분을 고심하는 거의 비생산적인 나의 개인적인 치졸함이 전적으로 흐믓한 밤입니다. 하여 “시“를 고민하는 밤이 한없이 깊기를, 죽을 때까지 ”시“에 집착하기를, 그래서 ”시“로써 내 생을 완성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다시 나를 돌아볼 수 있도록 격려해주신 전북도민일보사와 심사위원님들께 온 마음을 다해 감사 인사드립니다. 다시 힘차게 출발하겠습니다. 다시 꿋꿋하고 미련하게 “시”를 쓰겠습니다. “시”를 쓴다는 사명에는 어떤 정답도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 순간입니다. 감사합니다.

 

▲양병호 시인 심사평 “어두운 세상을 성냥 치는 불빛의 시”

세상은 미세먼지 자욱하고, 인생은 흐리멍덩 쓸쓸하다. 자본은 탐욕을 무한증식하고, 노동은 춥고 억울하다. 과학은 인간을 삭제하고, 인간은 자연을 추억한다. 속도는 속도를 추월하고, 문명은 외려 불편하다. 모든 국가는 애국을 빌미삼아 이기주의로 치닫는다. 태양은 식어가고, 별빛은 침침하다. 지구의 겨울엔 경쟁경쟁 낙엽이 지고, 효율효율 바람이 분다. 본의 아니게 막차를 놓친 사람은 환멸조차 심드렁하다.

이러한 때 골방에서 밀교자처럼 외로움의 연필로 시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저들의 불면과 언어와 고뇌와 환상은 어두운 세상을 성냥 치는 불빛이 될 것이다.

그 성냥불빛 같은 시편들 속에서 최종 다섯 편이 빛났다. 김향숙의 「곰보꽃게거미」 전진욱의 「부정과 긍정 사이」, 송아리의 「초대」, 박준성의 「표준형 인간」, 최재영의 「명옥헌별자리」이다. 이들 작품은 모두 치열한 내공의 시간을 통과한 수준 높은 미학을 성취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새로운 언어미학과 완결성 측면에서 「표준형 인간」과 「명옥헌별자리」가 남았다. 선택의 고민이 오래 이어졌다.

「표준형 인간」은 세계와 자아가 겪는 불화에 대한 연민의 정서, 경쟁사회를 살아내는 인간의 슬픈 운명을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참신한 언어의 활달한 운용,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웅숭깊은 사색이 돋보였다. 환한 시의 미래가 기대된다.

「명옥헌별자리」는 배롱나무를 통해서 작동하는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이 밀도와 집중력을 확보하고 있다. 나아가 꾀죄죄하고 지리멸렬한 인간의 삶을 우주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하여 창발하는 상상력의 품새가 호연하다. 자아와 세계의 화평한 동일화를 인연의 합일로 이루어내는 서정 또한 “눈물겹게, 붉다.” 작품의 구조와 시상의 전개 역시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게 흘러서 황홀한 미학을 성취한다. 더불어 투고한 「꽃뱀」, 「모루」 역시 가편이다. 당선이다. 훌륭한 시인이 될 것이다.

▲양병호 시인·전북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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