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시간
예술가의 시간
  • 박인선
  • 승인 2018.12.30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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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作 샘(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처음엔 칼럼 기고 제안을 받고 망설여졌다. 일정 기간을 고정게스트로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답변을 하기도 전에 미적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함정에 빠져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해가 이렇게 빠르게 지난 적이 없었다. 대중 독서가들의 소리 없는 비판도 있을 법 하다. 

 가끔씩 인터넷신문에 수필을 써오면서 느끼는 소소한 재미쯤으로 가볍게 생각해서 출발했었다. 주제 파악이 부족했었다고 고백하고 싶다. 글 쓰는 일도 조금은 중독이다. 요즘은 어느 순간에도 작업이 편해졌다. 스마트폰 때문이다. 글쓰기 작업의 도구로 그만이다. 이동성과 작업성이 용이해지면서 필수가 되었다. 인간의 촉수를 스마트폰만큼 잘 따라주는 이가 또 있을까. 예전 같으면 책상 앞에 앉아야 가능한 일들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가능해졌다.

 스마트폰은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의 구미에 내 손 안에 장난감 같이 제격이다. 전시회 검색을 해보니 눈에 들어오는 전시회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기획한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987~1968) 전이다.

 예술가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저마다 자신의 존재감들이 삶이나 작품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나 뒤샹의 작품은 시작부터가 반 예술적이다.

 그가 최초로 공장에서 만든 남성용 변기를 ‘샘’이라는 작품으로 전시회에 내놓으면서 사건은 촉발된다.

 1917년이다. 100년전의 사건은 기존의 예술작품에 대한 개념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시작점이다. 이제는 현대미술을 가장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였지만.

 미국 독립미술가협회가 주관한 전시회에서 전시위원들의 반대로 뒤샹의 ‘샘’전시는 수포로 끝난다.

 전시회는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참여가 가능한 개방된 전시회 였다.

 뒤샹의 생각은 작품이 작가의 손으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성제품, 즉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제품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음을 새롭게 보여주는 시도였다.

 당시 전시회를 주관했던 전시위원들은 그들이 출판하는 잡지를 통해 의미 있는 기고를 해주었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이 실용적인 특성을 버리고 새로운 목적과 시각에 의해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창조된 것이다.” 라고 하였지만 전시는 커녕 천덕꾸러기가 되어 원작 ‘샘’은 그 후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라는 사진작가에 의해 촬영된 사진만이 오늘날 보여지게 되었다.

 현존하는 작품들은 1950년대 이후 뒤샹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원작의 아이디어를 리메이크한 작품들이라고 한다.

 뒤샹의 샘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하다. 그는 작품 제작뿐만 아니라 작품에 쓰인 싸인도 그의 아내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언뜻 어느 유명 연예인의 예술품 대작 사건과 유사하다는 생각이다.

 예술이란 논쟁의 산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100년이란 시간을 한 예술가의 작품을 통하여 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혀 왔다는데 가치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예술가에게 100년의 시간은 찰나의 순간인지도 모른다.

 물리학에서는 빠르게 움직이는 사물의 시간은 느리게 움직인다고 한다.

 일의 양과 시간은 수식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시간의 가치는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지표라 할 것이다.

 아쉬움의 시간을 새해의 다짐으로 맞이하겠다는 각오를 해본다.

 글/=박인선 정크아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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