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객사와 풍패지관(豊沛之館)
전주객사와 풍패지관(豊沛之館)
  • 오광석
  • 승인 2018.12.11 1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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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칼럼 주제는 전주 시민이라면 누구나 보아왔던 객사에 붙어있는 대형 편액에 대해서 써 보고자 한다.

 객사 현판의 글씨 ‘풍패지관(豊沛之館)’은 조선시대 익산 출신의 표옹 송영구(瓢翁 宋英耉/1556~1620)와 깊은 인연이 있는 명나라의 문장가이며 명필인 주지번(朱之蕃)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의 인연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러하였다.

 1593년에 표옹 송영구가 서장관(書壯官)직분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표옹이 북경에 머무는 동안 숙소의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던 청년이 있었는데 그 청년이 불을 때면서도 무언가 계속 중얼거려서 들어보니 장자(莊子)의 남화경(南華經)을 읊으면서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표옹이 그 청년을 불러 물어보니, 그는 남월(南越) 출신으로서 과거를 보기 위해 북경에 왔으나 여러 차례 낙방하여 호구지책으로 객사의 잡부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표옹이 그에게 과거시험 답안지를 어떻게 작성했는지 종이에 써 보라고 하니, 그는 문장의 이치는 많이 깨우쳤지만 답안지 격식에 미흡한 점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표옹은 조선의 과거시험에서 통용되는 모범답안의 작성요령을 알려주고 몇 권의 책과 돈까지 쥐어주었는데, 그 후 과거에 합격한 젊은이가 바로 주지번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주지번이 표옹을 만난 지 2년 뒤인 을미년(1595년)에 명의 과거에 장원급제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중국의 문장가로도 유명한 한림학사 주지번이 1606년 황태손의 탄생을 알리러 명의 사신 정사자격으로 조선에 오게 된 것이다.

 조선에서는 명나라 사신 일행을 영접하기 위하여 당대의 문사로 유명한 대제학 유근을 접반사로 허균을 종사관으로 뽑고 선조는 영은문까지 직접 나가서 사신 일행을 맞이하였다.

 그 당시 문헌에 정확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내려오는 설에 의하면 주지번이 사신으로 와서 공무를 마치고 익산 왕궁에 기거하던 표옹을 만나려고 익산으로 가면서 전주객사에 들려 풍패지관(豊沛之館)이란 현판 글씨를 써 주었고 익산으로 가서는 표옹에게 선친을 여의고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망모당(望慕堂)의 편액을 써 주었다는 것이다.

 실제 망모당(望慕堂) 편액에는 주지번서(朱之蕃書)라고 낙관이 되어 있으며 망모당은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렇게 주지번이 익산으로 송영구를 만나러 와서 편액 글씨를 썼다는 설과 전주에 내려오지 않고 한양에서 써 주었다는 설이 있다.

 주지번이 표옹을 만나러 익산에 왔다는 설을 부정하는 측의 주장은 주지번이 사신으로 왔다가 갈 때까지 수행한 접반사 유근의 종사관이 되어 그 임무 수행과정을 기록한 허균의 문집 속에 있는 병오기행(丙午紀行)을 보면 주지번이 사신으로 와서 10여 일간 한양에만 머물다가 떠났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더라도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한 나라의 사신이 개인적인 일로 익산까지 왔겠느냐 하는 의문점이 들 수밖에 없다.

 사실이 어찌되었건 풍패지관과 망모당의 글씨는 중국의 명필 주지번의 글씨임에는 확실한 것 같다.

 전주 객사의 현판 ‘풍패지관’은 초서체의 호방하고 힘찬 필체로, 가로 4.6m, 세로 1.7m의 엄청난 크기로 제작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큰 이목을 끌고 있다.

 주지번이 써준 풍패지관(豊沛之館)이란 유방이 고향인 지금의 강소성 패군(沛郡) 풍현(豊縣)에서 기병하여 한(漢)나라를 세우고 제위에 오르자 그 뒤부터 제왕의 고향을 풍패(豊沛)라고 칭하였다.

 이성계의 실제 출생지는 함경도 영흥이지만,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이자 전주 이씨의 관향(貫鄕)으로 전주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고향임을 알고 풍패지관이라고 써 주었으니 역사성을 띠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객사는 전주뿐 아니라 고려 이후 각 고을에 설치되었는데 빈객을 접대하고 숙박시키는 곳이지만 전패를 모시고 국왕에 대하여 예를 행하던 곳이며 조정의 칙사가 오면 이곳에 유숙하면서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고, 지방 고관이 부임하면 먼저 이곳에 들러 배례를 올리던 곳이었다.

 400여년이 지나서 주지번이 전주에 직접 내려와서 써 준 것인지 아니면 한양에서 써 준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전주의 중심에 있는 객사에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뜻하는 거대한 편액을 설치하여 전주라는 지역의 품격을 높였으며 그 상징적 의미도 매우 크다고 본다.

 한 나라를 세운 왕조의 본향 전주시민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객사의 풍패지관(豊沛之館)이란 현판 글씨를 눈과 마음으로 담아 가길 바란다.

 

 글=원암 오광석(전북미협 서예분과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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