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 김동수
  • 승인 2018.11.2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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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끝은 어디일까? 죽음일까? 아님 그 너머에 또 무슨 세계가 있는 것일까?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자탄한 버나드쇼의 묘비명처럼, ‘내 인생도 어느 날 그렇게 끝나고 마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하는 날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죽음을, 그림자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과의례로 보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의연하게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존 번연도 그의 『천로역정』에서 ‘죽음은 감옥에서 나와 궁궐로 들어가는 통로일 뿐, 폭풍의 바다에서 헤어 나와 안식의 항구로 들어가는 것’이니 죽음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門)이라고 했다.

 이는 삶과 죽음을 단절로 보지 않고 하나의 연속성으로 보는 불교의 윤회(輪廻)나 기독교의 부활과도 다르지 않는 연기론적 세계관이다. 이승에서 착하게 살아야 죽어서 천당의 문에 들어갈 수 있고, 극락에도 갈 수 있다고 하는 요즘의 ‘웰빙(well-being)이 곧 웰다잉(well-dying)이다’고 하는 화두와도 다르지 않은 맥락이다.

 ‘오늘 내가 점심을 대접하면 이것이 내게 아름다운 소문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이 그것이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다른 에너지로 변화하여 되돌아오기 때문에, 죽음은 궁극적으로 소멸이 아니라 결과에 따라 윤회를 거듭하고 있다. 만해도 그의 시 「님의 침묵」에서 ‘이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라고 했듯이 영적으로 깨친 자들에게 있어서의 ‘죽음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며, 절망이 아니고 희망인 셈이다.

 세상의 모든 끝은 이처럼 새로운 시작을 하고 온다. 춘하추동의 순환도 이러한 자연의 이법에 따라 봄에 뿌린 씨앗이 가을에 열매가 되고, 그 열매가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다른 생(生)이 다시 시작된다. 이러한 연기와 윤회로 우주만상이 생멸을 거듭하며.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이 하나로 이어져 순환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우리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태어나서 죽어가는 허무적 생사관(生死觀)을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생성적 사생관(死生觀)으로 죽음의 본질을 새롭게 정립한 이가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겨울을 일 년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고, 일 년의 마지막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겨울을 일 년의 시작으로 보는 농부는 겨우 내 객토도 하고 농사준비 기간으로 보내지만, 게으른 농부는 겨우내 움츠리거나 사랑방에서 노름이나 합니다. 그러나 일 년 후 추수에서 두 농부의 차이는 엄청날 것입니다. - 김덕권, 「죽음보따리」에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새로운 생명이 소생하듯, 잘 죽어야 다시 잘 태어날 수 있다 하니, 죽음은 새로운 탄생의 밑거름이 된다. 태어나 사라지는 ‘생사(生死)’의 세계가 아니라,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우주적 ‘사생(死生)의 자연관’으로 내세에 대한 기쁨과 소망으로 남은 생을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 앞에서 보다 경건하고 자유로운 노년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주치의인 티벳의 배리커진 스님도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업에 따라 다시 돌아오기에 현세에 수행을 멈추지 말고 선행을 많이 베풀어야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진정 두려워야 할 것은 ‘내일의 죽음’이 아니라 ‘오늘의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생은 그날의 풀과 같고,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으며’(시편 103장),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야고보서 4장) 그렇다. 인생무상, 죽지 않은 생명은 없다. 그러기에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죽어간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져 가는 이생과 사, 사생(死生)의 윤회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죽어도 죽지 않은 영생의 삶이 될 것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볼 일이다.

 김동수<시인/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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