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적 정의로서 화해”
“회복적 정의로서 화해”
  • 김양현
  • 승인 2018.11.2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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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있었던 국정감사에서 한 의원님이 특정 사건을 언급하며 모 지방노동위원회가 부적절한 화해를 강요했다고 지적하셨다. 여기서 이 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소개할 수 없지만, 어느 한쪽의 얘기로만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 여하튼 이 사건 화해시도는 결과도 좋지 않았지만, 그 과정 또한 매끄럽지 못한 사건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 사건 화해는 우선 명분이 무엇인지 불명확해 보였다. 화해는 분쟁당사자 사이에 당해 분쟁 경위에 대한 깊은 공감대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므로 무엇보다 화해하려는 동기 내지 목적부터 공통의 명분이 있어야 한다. 비록 금전적 보상을 통해 거래 한다 하여도,

  화해를 하는 최고의 명분은 관계회복이다. 관계회복은 사건의 이면에 얽혀있는 서로의 고통과 배경 등 당시의 그렇게 한 행위의 전반적 맥락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비록 다시 근로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하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원망과 서운함 또는 미움과 배신감으로 얼룩진 마음일랑 훌훌 털어버리고 그간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회복이다.

  그러나 말이 쉽지 진정한 관계회복을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조건이 있다. 우선 관계회복은 모든 것에 대한 직면(만남)을 요구한다. 물론 이러한 만남은 누구에게도 불편한 자리고 고통이 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만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풀 수 없다. 상대방과 만남, 진실과 만남, 양심 내지 내면의 목소리와 만나야 한다.

  그다음 중요한 것은 정의에 대한 관념을 응징에서 화해와 평화로 일치시켜야 한다. 우리는 각자 정의에 대한 나름의 생각으로 산다. 특히 우리 국민은 지난 촛불혁명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못은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그리고 공정과 형평성은 어떻게 자리 잡아야 하는지 등등에 대하여 관심이 높고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응보적 정의관에 사로잡혀 있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 보복적 논리가 보편적 정의관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많겠으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우리 국민들이 정의롭지 못한 사례를 하도 많이 겪어서 그럴 것이다. 솔직히 나 자신도 터무니없는 이유로 근로자를 해고하거나 불이익을 준 사용자를 볼 때 법의 이름으로 재단하여 응징하는 것이 정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서로의 억측과 오해, 혹은 애증 때문에 관계가 어긋나고 급기야 파탄의 경지에 이르러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당사자들을 만날 때 과연 고작 법전에 나오는 몇 줄의 법적 정의로 재단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다. 불가피 판정은 하지만 우리 위원들의 판단이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근원적 해결에 아무 도움도 못 주는 현실에 자괴감과 무력감이 들기도 한다.

  보복적 정의에 기초한 세상은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켜 사라져 버리게 하지 않는 한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복이 아닌 회복을 위한 화해가 되어야 한다. 관계회복을 통해 비로소 영구적인 정의를 세울 수 있고 평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화해는 가장 세속적이며 가장 성스러운 분쟁해결 방법이다.

  새삼 강조하지만 화해는 갈등하고 분쟁하는 사람들에게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문제를 법정 밖에서 풀자고 호소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강자가 궁박한 약자에게 강요해서 되는 것도, 당사자를 사법적 혹은 행정적 권위로 억눌러서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당사자가 화해를 원하는 기미가 조금이라 보이면 열 일 제치고 화해를 적극적으로 주선한다. 누가 뭐래도 그들의 생각이 내 판단보다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화해가 주는 치유와 회복 능력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김양현 전북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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