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공평하지 않다
역사는 공평하지 않다
  • 장상록
  • 승인 2018.11.1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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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에서 성삼문은 세조를 ‘나리’라 부르고 있다. 그는 단종의 충신이자 시대의 양심이었다. 그런데 비슷한 길을 걸은 또 한 사람이 있다. 경종의 충신 김일경이다. 그는 왕이 친국하는 자리에서 영조를 향해 ‘너’라고 지칭했다고 한다. 성삼문에게 세조가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에 불과했다면 김일경에게 영조는 형을 독살하고 왕좌에 오른 무도한 ‘무수리 아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김일경은 왜 잊혀 진 것일까. 그리고 성삼문과 김일경의 차이는 무엇인가.

 “회의는 춤춘다.” 나폴레옹을 제거한 유럽은 비엔나에서 전후질서에 대한 열강의 합의를 이끌어낸다. 비엔나 체제의 출범이다.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 주도하에 승전국은 물론 프랑스도 참여한 이 회담은 춤과 연회의 연속이었다.

  말 그대로 회의가 춤추는 시간 속에 결정 된 중요한 사항들은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유럽 각지에 전파된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일소하는 것이 회담의 가장 큰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외교사의 출발점이기도 한 이 회담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바로 패전국인 프랑스의 외교역량이다.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인 탈레랑은 승전국 사이의 분열을 이용해 프랑스의 이익을 지켜낸다. 여기서도 희생자는 여전히 강한 프랑스가 아닌 약소국이었다. 그것은 마치 전범국 일본이 아닌 피해자 한국이 분단되는 과정과 닮아있다.

 서세동점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중국문명의 수준은 오랜 기간 유럽에 월등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명 제국에 와서 현재까지도 많은 학자들이 의문을 가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차에 걸쳐 이뤄진 정화 함대의 원정과 그 후 벌어진 명의 해금정책이다. 최대 8천톤급 대형선박을 포함한 100여척의 선단에 최대 3만 명의 인원이 18만 5천 킬로미터를 항해한 원정항로는 동남아 각국은 물론 인도와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아프리카 소말리아 해안에 까지 이른다. 1492년 콜롬부스가 이용한 배는 정화 함대에겐 장난감 수준이다. 19세기 영국 해군에 의해 깨어지기 전까지 지구상 그 어떤 배도 정화 함대가 보유한 배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만일 정화 함대가 인도양이 아닌 태평양으로 항해했다면 현재의 미국 서부에 도착했을 것이고,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으로 향했다면 유럽에 다다랐을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정화 함대의 경우는 의문을 던진다.

  명나라가 정화 함대 규모의 해군력을 확장이 아닌 현상유지만 했어도 유럽인의 아시아 침략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역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1433년과 1820년의 분기점은 1840년 아편전쟁으로 기나긴 호흡을 마친다고.

  1433년은 정화 함대의 마지막 원정이 끝나던 해이고 1820년은 많은 학자들이 서세동점의 출발로 보는 시기다.

 콜롬부스 이후 진행된 살육과 약탈의 역사는 정화 함대의 찬란한 빛과 그 종말에 대해 더욱 강한 의문을 남기게 된다.

  정화와 콜롬부스의 차이는 과연 무엇인가.

  역사는 모든 지역, 모든 인민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만고의 충신이 된 성삼문과 조선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역적의 대명사로 남은 김일경의 차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작다. 비엔나 체제에서 피해를 본 약소국과 얄타 체제하의 한국도 본질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다. 그것은 프랑스와 일본이 누린 혜택에 반비례한다.

  또한 정화와 콜룸부스의 차이는 선의와 욕망의 차이에서 기인하는지 모른다.

  역사는 언제나 공평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모든 인과관계에서 완벽히 벗어난 불공평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일경에겐 성삼문이 가진 정서의 공유가 부족했고 분단된 한국에는 외적 요소에 맞서 싸울 내재적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 같은 일제치하 남원에는 성리학적 가치가 여전히 확고했고 함경도 지역엔 아동들까지도 볼쉐비즘에 열광하고 있었다. 명나라의 선의가 오만의 다른 이름으로 변질 된 것 역시 콜롬부스의 욕망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역사는 공평하지 않다. 그에 대한 가해자의 책임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공평함에 대한 미련은 때로 자기변명의 신기루가 된다.

장상록<예산군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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