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그 아름다운 낙엽의 계절
11월, 그 아름다운 낙엽의 계절
  • 정영신
  • 승인 2018.11.08 18: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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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분다. 11월의 바람이다. 담황빛 은행잎이 손 붉은 단풍잎이, 적홍 황홍 떡갈나무잎들이 11월의 바람에 실려 거리에 호젓한 숲길에 후울 후울 흩날린다. 낙엽이다. 11월의 시(詩)들은 ‘…… 낙엽이 떨어지고 또 날린다./……황토빛 감나무에/ 달랑 까치밥 한 알 뿐이다./……’(이정림,‘십일월’)처럼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주로 표상하고 있다.

 한국시 대사전에도 낙엽을 소재로 한 시가 47개나 등장한다. 그 시들 속에서 낙엽은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이거나 상실, 아쉬움, 기억의 반추, 시간의 단절, 재회의 기대, 인고의 기다림, 새로운 시작의 단초, 낭만, 따뜻한 가슴, 관능적인 미, 자유로운 영혼 등 주로 떨어지고 날리는 하강의 심상과 대지에 덮이고 쌓이고 밟히고 채임에 대한 좌절이나 우울감, 포용과 인내, 포근함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들이 대부분이다.

 국적과 나이를 불문하고 세계인들에게 널리 애송되는 낙엽에 관한 시는 프랑스의 시인 레미 드 구르몽과 헤세의 ‘낙엽’ 시가 대표적이다.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낙엽 빛깔은 정답고 그 모양은 쓸쓸하다./낙엽은 버림받고 땅위에 흩어져 있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해질 녘 낙엽의 모습은 쓸쓸하다./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흐느낀다./낙엽은 날갯짓 소리, 여인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가벼운 낙엽이리니,/벌써 밤이 되고, 바람은 우리를 휩쓴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구르몽의 ‘낙엽’이다.

 프랑스 노르망디 명문가 출신인 구르몽은 26세 때 결핵의 일종인 낭창에 걸려 온몸에 염증이 생기고 얼굴까지 흉해져 외출도 거의 하지 못하고 고독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실제로 구르몽은 52세 때 작가 지망생이었던 33세의 나탈리아는 여인을 사랑했지만, 자신의 추한 외모 때문에 그리고 자유분방한 그녀를 끝내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지 못하고 두 사람이 주고받았던 편지만 ‘아마조네스에게 보낸 편지’라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그녀는 1972년 9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묘비명에는 ‘구르몽의 아마조네스’라고 새겨져 있다. 생전에 구르몽은 그녀를 아마조네스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탈리는 ‘낙엽’ 시 발표 후에 만났기 때문에 그 시에서 애타게 부르고 있는 ‘시몬’이 아니다. 여전히 ‘낙엽’ 시의 주인공인 시몬은 미지의 여인이다.

 구르몽은 혐오스러운 외모로 인해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지만, 그의 여인 시몬에게 낙엽이 흩날리고 쌓이는 숲으로 가자고 정중히 권하고 있으며, 매 연마다 그 낙엽 밟는 소리가 진정으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 끊임없이 묻고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그의 여인이 밟아가는 낙엽 소리는 사스락 사스락 새들의 날갯짓 소리처럼 보드랍고 다감하고, 여인의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처럼 요염하고 교태스럽다. 시인 김광균도 ‘설야’에서 한밤중 눈이 내리는 소리를 ‘어느 먼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고, 역시 그 시각적인 눈이 날리는 소리를 청각적인 공감각적 심상으로 농염하게 표현을 했다.

 헤세는 ‘꽃마다 열매가 되려고 합니다./아침은 저녁이 되려고 합니다./변화하고 없어지는 것 외에는/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나뭇잎이여, 바람이 그대를 유혹하거든 가만히 끈기 있게 매달려 있으십시오.//그대의 유희를 계속하고 거역하지 마십시오./조용히 내버려 두십시오./바람이 그대를 떨어뜨려서/집으로 불어가게 하십시오.’라고 ‘낙엽’을 노래했다. 헤세 역시 개신교 선교사 출신인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정신병원 신세를 질만큼 한동안 방황을 했고, 독일 나치즘을 비판하다가 탄압당했으며, 결국 모국인 독일을 떠나 스위스인으로 살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헤세의 ‘낙엽’ 시에는 낙엽의 상징적 의미들이 그대로 내재하여 있다. 낙엽은 기후나 토양의 변화에 민감하다. 낙엽의 일생은 곧 우리의 인생이다. 씨가 뿌려지고 싹이 트고, 자라고 꽃 피우고 열매 맺고 오색 단풍의 절정기를 지나 노숙(老熟)이나 생육환경의 변화로 이층(離層) 현상에 의해 줄기로부터 떨어져 바람에 날리고 흙 속에 묻힌다. 이국에서 생을 마감한 헤세는 ‘바람이 그대를 떨어뜨려 집으로 불어가게’ 해 주길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진정한 안식처는 결국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그 ‘집’이다.

 11월, 낙엽의 계절 11월이다. 11월은 단 한 장 남아있는 12월 덕분에 아직은 다시 만회할 수 있는 기회와 속죄의 달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이해가 다 가지 않은 게. 바람이 분다. 낙엽이 날린다. 사랑하는 이의 손을 꼭 잡고 낙엽이 날리는 상수리나무 숲길, 마이산 연인의 숲길로 걸어가 보자. 그리고 그 사스락 사스락 여인의 옷자락을 스치는 듯한 낙엽 밟는 소리가 얼마나 좋은지 연인의 이름을 부르며 가만히 속삭여 보자.

 정영신<전북소설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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