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 전주
나의 고향, 전주
  • 최정호
  • 승인 2018.10.29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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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린 시절 장래에 어떤 사람, 어떤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꿈’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집안 환경이나 가족 관계에서 발생하는 고통이나 원한도 없었기에 간절한 소망도 원대한 포부도 가져본 기억이 없다. 다만, 어린 시절에 집안 서재에 널려 있는 그리스 신화나 고전 전집을 읽고 위인들의 사상을 접하면서 다양한 인간성의 해석에 놀라고 감탄해 했던 기억이 있다. 부모님이 이끈 대로 일찍이 초등학교 5학년에 서울로 유학을 가고, 다시 중학생 때 소환당해 전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대학교를 서울로 가서 성형외과 전문의가 91년도에 되어 올해까지 서울에서 개원했다가 지난 10월에 전주로 귀향했으니 실로 40여 년만의 귀환이다. 자식들이 성장하여 결혼도 하였으니 이제 내게 지워진 ‘애비’의 의무를 상당 부분 다 한 셈이고, 노쇠하신 부모님께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적어도 외롭고, 쓸쓸한 노년에 위로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라 하지 않았는가? 나의 부모님은 나를 기다려 주셨으니 얼마나 은혜로운 분들이신가? 아니 나는 80이 훨씬 넘은 부모님의 보살핌을 다시 받고 있지 않은가? 

 내가 이곳 전주에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내려와서 이제 막 한 달이 되었다. 가히 효자 효녀의 고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들 며느리가 치매, 뇌졸중, 당뇨 등등 노환에 시달리는 90이 넘은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과 요양원을 넘나들며 생의 마지막 자락을 함께하시는 분이 온 병원에 가득하다. 인구의 노령화는 병원의 풍경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장모 장인을 모시는 사위도 적지 않다. 공자가 이곳 전주에 환생한다면 주나라의 예(禮)가 만개한 요순시대라 감탄하지 않을까? 인간의 도덕적 감정을 분류한 맹자의 사단(四端), 즉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시시비비를 분별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늙고 병든 부모님에 대한 효심을 어찌하겠는가? 나는 이곳 전주에서 주나라 예법의 모범에 감탄하며, 이러한 유교의 전통이 ‘물신’에 빠져버린 오늘의 대한민국에 인간 중심주의 르네상스를 견인할 가능성을 발견한다. 우리는 공기나 물과 같은 고마운 사용가치를 지닌 필수 물질보다, 무엇이나 구매 가능한 <돈>의 교환가치에 매달리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돈>이 사랑이고, 효자이고, 우정이 되어버렸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무엇인지 점점 우리는 망각해가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망각>을 거부하는 자는 낙오자가 되고, 무능한 자가 되고, 불효자가 된다. 삼강오륜이 물구나무를 서도 놀랍지 않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이웃 친지들이 모여 농사짓고, 씨족들이 어동육서(魚東 肉西), 생동숙서(生東熟西), 조율이시 홍동백서를 논하며 제례를 올리고 살던 농경문화를 벗어났다. 많은 사람들은 가뭄과 홍수보다 주가와 환율에 영향을 받고, 더 많은 사람들은 쌀 한 섬의 가격보다, 커피 한 잔, 버스 택시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그리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환경에 취약하고, 사회적 조건에 의존적이다. 이익을 내지 못하면 망하는 것이 기업이고, 많은 재산을 유산으로 받지 못한 자는 자신을 상품으로 팔아야 생존이 가능하다. 굶지 않고 따뜻한 이부자리 안에서 잘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의 삶은 50년 전에 비하여 <행복>해 졌는가? 40여 년 전의 나는 대학에 합격하여 전주를 떠났다. 내가 살아온 쾌적을 나는 생생히 그리고 희미하게 기억한다. 이제 백발이 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전주를 떠나던 10대의 청년은 중년을 넘어 노년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나이기를 멈추지 않았지만, 과연 나는 40여 년 전의 <나>와 동일한 <나>라고 할 수 있는가? 내 고향 전주도 과거의 전주가 아니고, 미래의 전주도 오늘과 다를 것이다. 내가 나를 만들어가듯, 전주도 그렇게 변해간다. 내가 나의 육체라는 공간 안에 지속하는 시간적 존재이듯이, 전주는 우리의 삶이 시간 속에 공동으로 펼쳐지는 공간이다. 나는 덜 산업화 되어 있고, 덜 개발되어 가난한 전주가 좋다! 내가 이기주의자라서 그런가? 아니면 아직 철이 덜 들었는가?

 최정호<대자인병원 성형외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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