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차, 마시는 골동품
보이차, 마시는 골동품
  • 이창숙
  • 승인 2018.10.28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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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39>

 보이차는 중국의 운남성 남부지방에서 생산되는 발효차이다. 찻잎이 차가 되기까지, 차나무의 생육환경은 차를 만들고 마시는 방법에 영향을 주며 제다 방법을 달리한다. 보이차는 후발효차로 기본적인 제다 과정은 알려져 있으나 소수민족들의 섬세한 비법은 비공개적인 경우가 많다. 보이차의 명성 탓에 중국에서 생산되는 후발효차는 모두 보이차인 것처럼 차의 대명사가 되었다.

 명성만큼 제갈량(諸葛亮, 181~234)에 얽힌 전설도 있다. 제갈량이 남만 토벌에 나섰는데, 맹해지역 남나산을 지날 때 병사들이 풍토병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된다. 이것을 본 제갈량이 지팡이를 산에 꽂자 그 지팡이가 차나무로 변해 그 찻잎을 따서 병사들이 끓여 먹자 눈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남나산의 포랑족들은 제갈량을 차의 시조로 모신다. 그가 베푼 은덕에 감사하며 해마다 7월23일 제갈량의 생일이 되면 제사를 올리고 있다. 보이차에 대한 유명세는 청나라(1636~1924) 건륭황제에게 차를 공납하면서 보이차가 정교하게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옹정 때에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건륭시대에 사모(思茅: 지금의 보이시에 사는 장족의 복씨가 있었는데 그는 조상 대대로 차를 만들어 황실에 공납하였다. 좋은 찻잎만 선별하여 차를 만드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1년 중에 가장 먼저 올라오는 어린 차싹을 채취하였다. 찻잎을 채취하기 위해 날씨를 살폈다. 잎의 크기, 잎의 색, 벌레 먹지 않은 잎 등 선별된 찻잎으로 차를 만들었다. 차를 만들기 전에는 목욕재계하고, 먼저 제갈량에게 제사를 올린 뒤에 차를 만들었다.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런데 어느날 복씨가 심한 병으로 앓아누웠다. 차를 만들기가 어렵게 되자 아들이 대신 차를 만들게 되었다. 아들은 당시 젊은 나이로 이무(易武)의 마흑(麻黑)에 사는 소금장수의 딸과 사랑에 빠져있었다. 그러다 보니 차를 만드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는 차를 완전히 말리지 못한 단차(團茶)를 만들어 북경으로 떠났다. 3개월이 걸렸다. 도착하여 차를 살펴보니, 가는 도중에 우기를 만나 찻잎이 갈색으로 변해있었다. 이에 당황한 아들은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다행히 목숨만은 건져 가져온 차를 그대로 황궁에 내놓게 된다.

 건륭황제(1711~1799)는 각 지역에서 올라온 차를 직접 품평하였다. 올라온 차는 품종과 색상이 진귀하고 아름다웠다. 우열을 가르기가 어려웠다. 갑자기 보름달처럼 둥글고 커다란 차가 황제의 눈에 들어왔다. 복씨의 아들이 가져온 차였다. 차의 탕색은 맑고 붉고 진하였다. 마치 보석과 같은 빛을 발휘하였다. 건륭은 이 차를 가져오게 하여 향기와 맛을 보았다. 맛은 부드럽고 달며 상쾌하였다. 황제는 이 차의 이름을 그 자리에서 보이차라고 명명하였다. 보이차는 공차(貢茶)로 지정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 후 건륭은 보이차를 좋아해 그의 시에서 “오직 보이차만이 묵직하고 품위가 있으며, 맑고 기품이 있어 작설차와 대적 할 만하다. 이 황금색 옥로를 맛보지 못했던 육우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야 한다”고 보이차를 극찬하였다. 보이차는 옹정시대에 더욱 빛을 발휘하게 된다.

 옹정황제(1678~1735)는 그의 심복인 악이태를 운남총독으로 임명하여 사모시에 보이부를 설치하고 운남의 서남지역을 관리하였다. 차무역과 공차에 대한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옹정은 황실에서 보이차를 즐겨 마셨으며 공적을 세운 영웅과 사신들에게도 보이차를 하사하였다.

 단췌(1724~1801)가 저술한(1799년) 『전해우형지』에는 “보이차의 명성은 높고, 육대차산에 속한 지역에서 생산된다. 주변 800리가 모두 차산으로 차나무가 자라며 차를 만드는 사람은 수십만 명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천성에 살던 사람들이 육대차산으로 이주하여 차나무를 재배하고 차를 만들어 더욱 이지역의 차가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1956년 중국이 사회주의 체제가 되면서 개인소유의 차창은 모두 합작사에 편입되었다. 보이차는 1940년부터 1980년까지 침체기를 겪게 된다. 2007년 4월 보이차의 브랜드명과 함께 사모시(思茅市)는 보이시(普?市)로 개명했다. 지명과 함께 보이차가 탄생하게 된다.

 글=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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