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조차 남지 않은 육삼정 의거 현장
흔적조차 남지 않은 육삼정 의거 현장
  • 이종호 기자
  • 승인 2018.10.23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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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항일운동가 <5>

 어떤 민족이 이토록 자신들의 민족혼이 담긴 투쟁의 역사현장을 내팽개치고 있단 말인가.

 조국을 위해 부모와 자식을, 그리고 자신의 청춘을 아낌없이 바쳐 이 땅의 독립을 이뤘던 독립투사들을 우리는 어떻게 위로할것인가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 함께 해외3대 의거로 꼽히고 있는 육삼정 의거.

 

 하지만 상해 일본대사 척살을 계회하고 시행했던 이 역사적 현장은 흔적조차남아 있지 않았다.

 맞은 편 미국인들이 건축했다는 건물은 그나마 한 유통회사의 창고로 쓰이며 형태라도 보존돼 있고 안내판이라도 있었지만 역사적 의거가 일어났던 육삼정 현장은 지하까지 깊숙히 파헤쳐져 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곳이 우리의 민족투사들이 외세에 저항하며 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역사적 현장이었다는 알림판도 없어 독립투사들의 그날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한 가닥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정화암이 해방후 귀국 전까지 이사장을 맡았다는 인성학교도 현재 상해 임시정부 청사부근에 있었다는 추정만 될 뿐 일반 상가로 바뀐지 오래다.

 1994년 상해에 468m 높이의 동방명주가 세워지고 이곳에 개발사업이 본격 시작되면서 상해는 개발을 위해 한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으며 분양가가 평당 2억 원인 아파트가 있을 정도로 땅값도 천문학적으로 치솟고 있다.

 아무리 그렇지만 우리의 민족혼을 느끼고 보존해야 할 역사적 현장을 이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것은 우리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도 없다’는 격언을 말로만 공감하며 실천은 하지 않는 게 아닐까.

 3.1운동이후 일경에 쫓기게 된 정화암은 중국으로 넘어가 북경에 정착했다.

 1924년 이회영,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 유자명 등과 함께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설립했다.

 이후 화암은 조국의 독립과 민중의 해방을 염원하는 아나키스트로서의 길을 올곧게 걸어갔다. 그는 독립운동의 이론적 정립을 위하여 기관지인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행했다.

 화암의 활동공간은 북경과 천진, 상해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930년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김좌진 피살 이후 북만주의 운동을 돕기 위해 화암은 동지들과 함께 북만주로 파견, 북만주 해림으로 건너간 화암은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만주 침략을 획책하던 일제가 북만주 일대에 대수색작전을 벌이자 부득이하게 상해로 귀환했다.

 상해로 귀환한 화암과 동지들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설립했다. 연맹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을 해방시킨 후 아나키즘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1931년 11월에는 동아시아 각국의 아나키스트들을 구성원으로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일본영사관과 일본군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항쟁을 계속했다.

 1932년에는 홍구공원 의거를 먼저 계획했지만 선수를 김구와 윤봉길에게 뺏겼던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정화암과 백정기 의사는 상해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라키가 중국 유력자들을 고급 요정 육삼정으로 초청해 연해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933년 3월 아리요시 공사를 사살하는 계획을 세웠다.

 “무장로에 있는 고급 요정 육삼정에서 일본 정계. 군부의 거물들과 중국 국민당 고관들이 회합을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했소.

 이 자리에는 일본 군부의 실세인 육군 대장 아라키 사다오와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도 참석합니다. 마침 백범 김구 선생이 준 폭탄도 있으니 이들을 폭살합시다”

 대원들은 다들 흥분해서 서로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다.

 할 수 없이 제비뽑기로 백정기, 이강훈이 결행하기로 하고, 원심창이 망을 보고 거사가 끝나면 승용차를 대기로 했다.

 잡히는 경우에 대비해 취조를 받을 때에 할 말도 미리 준비했다.

 그러나 거사는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일제가 내부 밀정으로부터 자세한 거사계획을 입수한 것이다.

 백정기와 이강훈, 원심창은 육삼정에서 200m 떨어진 송강춘이란 음식점에서 체포됐다.

 잠복하고 있던 형사대와 일경은 음식점 앞문과 뒷문으로 쏟아져 들어가 순식간에 이들을 결박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은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되었다. 검찰은 백정기, 원심창에게는 무기징역을, 이강훈에게는 15년형을 구형했다.

 최종공판에서 재판장은 검사의 구형대로 언도했다.

 백정기는 재판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자기가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폐병 중증인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내다보고, 죄를 자신이 뒤집어쓰면 건강한 동지들은 가벼운 형을 받고 출옥해 독립운동을 계속하라는 뜻이었다.

 상고를 포기한 백정기는 복역 중 3년도 안된 1936년 5월 22일 만 40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서거하기 전 백정기 의사는 동지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나는 몇 달을 더 못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여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례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송스러운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다.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를 바란다”

 

 

 

/상하이=이종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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