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구공원과 정화암
홍구공원과 정화암
  • 이종호 기자
  • 승인 2018.10.22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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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항일운동가 <4>

취재진이 방문한 홍구공원은 촉촉한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금은 아큐정전을 쓴 중국의 대문호 노신의 이름을 따서 명칭이 바뀌었지만 공원 한편에는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었고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졌던 현장에는 기념석도 세워져 있었다.

86년 전 오늘도 이곳에 이슬비가 왔을까.

1932년 4월 29일 이곳에서는 상해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일본군인, 각국 외교관 등 2만여 명이 모여 있었다.

일본 왕의 생일과 일본의 전승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가 열렸던 것이다.

이곳에 당시 25살의 청년 윤봉길은 도시락 폭탄을 땅에 내려놓고 어깨에 멘 물 통형 폭탄의 발화 끈을 잡아 당겼다.

그러면서 앞에 있던 사람들을 어깨로 밀면서 19미터 거리에 있는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중앙 식단 주위에는 일본 군경이 삼중의 경계망을 치고 있었지만, 폭탄은 정확하게 단상 중간에 떨어지면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오전 11시 50분쯤이었다. 이어 윤봉길이 도시락 폭탄을 집어 들려고 몸을 엎드리는 순간 일본군과 헌병들이 그를 덮쳤다. 윤봉길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고 외쳤다.

당시 단상에는 일본 군부와 정계 인사 등 7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가운데 상해 파견 일본군 사령관인 육군 대장 시라 카와 요사이노리(百千)와 상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 바다 사라쓰구(河端貞次)가 폭사했다.

해군 제3함대 사령관인 중장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는 전치 4주에 오른쪽 안구를 적출해야 했고, 육군 제 9사단장인 중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는 오른발 앞부분 일부를 절단했다.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고(시게미쓰는 1945년 9월 일본의 외무대신으로서 미주리 호 함상에 목발을 짚고 나타나 항복 문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상해 주재 일본 총영사와 상해 일본 거류민단 서기장도 전치 3~6주의 중상을 입었다.

중국 국민당 총재 장개석(蔣介石)은 윤봉길의 상해 홍구 공원 의거에 대해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한 것을 한국의 한 의사(義士)가 능히 해냈으니 장하다.”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윤봉길 의사는 이날 의거를 나서기 전 두 아들에게 이 같은 글을 남겼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서러워 마라”

거사 당시 그의 나이 겨우 25세. 두 아들은 아직 강보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어렸다.

그는 그런 어린 아들들과 아내, 부모를 두고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됐을 까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가 발생했던 홍구공원 현장. 상해=최광복 기자

 

애국심이라는 말은 교과서에서나 찾아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의식이 실종된 시대에 나라와 겨레를 위한 그의 뜨거운 열정을 우리는 가늠조차 할 수 있을까.

지금도 매년 4월 29일이면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그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의거를 먼저 계획했던 것은 정화암과 백정기 의사였다.

1930년대 상하이에는 여러 갈래의 독립운동 세력이 활동했다. 대표적인 것이 김구가 이끄는 임정과 한인애국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화암이 이끄는 남화한인연맹이었다.

말하자면 윤봉길과 백정기는 두 단체에서 뽑은 1932년 4월29일의 대표선수였던 것이다. 일본군이 거행한 `천장절 겸 전승축하대회‘는 무슨 행사인가. 1931년 7월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대륙침략의 야수를 드러낸 일본은 그해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결국 다음해 2월 상하이 사변을 자행한다.

상하이사변은 대륙침략을 중국 본토의 심장부에서부터 본격화하려는 일제의 계획으로 현지를 근거로 하는 장치중(張治中) 근위부대와 공산당 19로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하지만 끝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사기가 오른 일본군은 일본왕의 생일을 맞아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행사는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우리 독립 운동가들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정화암은 자신의 책에서 “오만무쌍한 일본의 기를 꺾어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고 우리의 민족정기를 보여주겠다는 우리의 결심은 대단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 때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라면 어느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정화암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윤봉길 기념관이 있을 자리에는 정화암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일왕의 생일에 맞춰 홍구공원에서 대대적인 전승축하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 정화암은 김제출신 독립투사 백정기를 의거자로 지명하고 철저하게 이들의 응징을 준비해나간다.

한방에 행사장을 쑥밭으로 만들 폭탄을 준비하고, 행사의 식순도 완전히 파악했고, 행사장 지리도 눈을 감아도 알 정도가 됐다. 그리고 행사장에 마음 놓고 들어갈 출입증도 잘 아는 중국인 동지가 구하기로 돼있었다.

이들은 윤봉길보다 빠른 거사를 기획했다. 윤봉길은 그날 오전 11시 이후로 거사시점을 잡았다. 이는 행사장에 나올 외교관이나 일본군과 무관한 귀빈들이 퇴장한 뒤 일본군만이 모인 시점에 폭탄을 터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화암과 백정기는 이보다 빠른 시간을 택했다. 일본인 이외의 다른 외국인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미안하지만 조국을 강탈당한 조선민족의 기개를 보여주는 마당에 그런 것까지 고려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경쟁단체보다 먼저 일을 성사시키자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거사 당일 행사장 주변에서 출입증을 가져온다던 중국인동지를 기다렸으나 끝내 중국인은 오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이 지나가고 말았다. “절호의 기회를 날리는구나”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홍구 공원을 뒤흔든 폭파소리가 들렸다. “아, 나대신 다른 조선인이 일을 성공했구나. 틀림없이 임정측 한인애국단원이 했을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이들은 서둘러 몸을 숨겼다.

상해=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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