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교육청의 ‘이중잣대’에도 안도한 이유
전북교육청의 ‘이중잣대’에도 안도한 이유
  • 김창곤
  • 승인 2018.10.21 1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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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정부가 민주당의 서류 가방을 훔쳤다.” 따옴표를 붙인 이 한 줄 글로 군사 정권의 경제 개발은 ‘도둑질’이 됐다. 전북교육청이 최근 고교에 배포한 한국사 보조 교재는 누군가의 ‘말’을 인용해 박정희를 깎아내렸다. 경제 개발은 장면 정부가 계획했으나 5.16 군사 정변으로 가로막혀 박정희와 군사 정권의 공으로 넘어갔다는 서술이다.

 <주제로 보는 한국사>라는 이름의 이 교재는 경부고속도로 개통에도 ‘빛’보다 ‘그림자’에 무게를 실었다. 개통 1년 만에 아스팔트를 다시 씌우기 시작해 보수비가 건설비의 네 배를 넘었다고 썼다. “도로가 누워 있으니 망정이지 서 있었다면 와우아파트처럼 무너졌을 것”이란 야당 의원 비판까지 적었다. ‘수출주도형 성장 정책’을 다룬 문단 제목은 ‘수출은 늘었지만 빚은 쌓여가다’였다.

 교재는 ‘대한민국 정통성’이나 ‘자유민주주의’를 언급하지 않는다. ‘민주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에 관심을 쏟았다며 전태일의 분신에 반 페이지를 할애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3대 세습과 인권에 대해선 서술하지 않는다. 김대중 정부의 6.15 공동 선언을 ‘역사적 사건’으로 기술했다. 광우병 사태는 이명박 정부가 국민 의견을 반영하지 않아 일어난 사건으로 규정했다.

 박정희 시대를 살았던 중장년 가운데 5·16쿠데타와 유신 독재가 ‘옳았다’고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그 장기 집권이 없었어도 한국의 성취가 가능했을지를 놓고는 의견이 갈린다. 경부고속도로만 해도 야당과 지식인들이 반대가 거셌다. ‘자가용 가진 사람이 몇이기에 그 큰돈을 들이느냐. 부자 유람길밖에 되지 않는다.’라는 비아냥까지 받았다.

 5,000년 굶주림을 딛고 번영과 시민 사회를 이룩한 자유민주 체제에 교재의 평가는 인색했다. 논쟁이 뜨거운 남한 단독정부 수립, 친일파 청산, 5.18 민주화 운동, 세월호 침몰, 촛불집회까지도 현 정권과 이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관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좌파와 민주당 선전 팸플릿이란 비판까지 받는다.

 진실로 역사를 채운다는 것은 이론이다. 진실은 시각에 따라 다르다. 다수결로 정립되기도 한다. ‘현실 권력’은 늘 역사를 장악하려 한다. 그러나 역사 학습 교재에서만은 특정 이념을 표백해야 한다. 고교생 다수는 평생 마지막 한국사를 공부한다. 역사 지식은 과거와 현재, 인간과 세계를 이어주는 가치관의 바탕이 된다.

 전북교육청은 학교 의사도 묻지 않고 이 교재를 배포해 ‘내로남불’이라는 비판부터 받았다. ‘헌법이 정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학문의 자유’는 교육청이 국정 역사 교과서를 반대하면서 부르짖던 구호였다. 정부가 작년 초 국정 교과서 연구학교와 보조 교재 사용 학교 신청을 받자 김승환 교육감은 학교에 공문을 보내 가로막았다. 학교 구성원 간 갈등과 수능 준비에 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도 붙였다.

 전북 교육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의 이중 잣대는 그들만의 ‘시대정신’과 ‘역사 인식’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들은 지식인으로 자임하면서 예비 시민들의 비판정신을 길러주겠다며 이 교재를 펴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 문명의 주역은 비판하는 지식인보다 땀 흘리는 기업인, 과학기술자, 장인, 노동자, 군인 그리고 정치 리더였다. 대부분 지식인은 겉으로 승복하고 관용하면서 속으론 조롱한다. 자신의 부조리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한다.

 ‘지식인’을 정의한 사르트르는 1,000만명 이상을 굶기거나 숙청해 죽인 스탈린과 모택동을 미화했다. 아시아·아프리카 저개발국 가는 곳마다 독재자들을 찬양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미국의 양심’으로도 불린 촘스키는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놓고 ①서구가 날조했다 ②소규모 살인이 있었을 수 있다 ③생각보다 많은 살인은 미국 전쟁 범죄로 농민이 잔혹해진 결과다 ④사실상 미국의 범죄였다고 차례로 주장을 바꿨다. “우리 학교에선 역사 보조 교재를 거의 참고하지 않는다”는 한 교사의 말에 안도의 숨이 나왔다.

 김창곤<전북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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