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가 낳은 인물, 백성을 대변하다
전라도가 낳은 인물, 백성을 대변하다
  • 설정욱 기자
  • 승인 2018.10.17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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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새로운 천년을 열다…4(完)

천년의 유구한 세월을 간직한 전라도는 한반도 역사와 경제, 문화의 한 흐름을 주도했다.

일본에 한학을 전파한 왕인박사부터 바다의 왕 장보고,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 전봉준 등 다양한 인물들이 활약했다.

특히 전북 출신 인물들은 백성의 입장을 대변하고 한반도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을 주장한 조선 전기의 사상가 정여립(1546~1589)은 조선시대의 인물 중에서 가장 첨예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전북 전주 출생인 그는 이이ㆍ성혼ㆍ박순(朴淳) 등 서인의 주요 인물을 비판한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낙향한 이후 대동계를 조직했는데 대동이란 큰 도가 행해져 천하가 공평해진다는 의미다.

정여립은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하는 등 혁명적인 명제를 가지고 호남을 중심으로 세상을 열고자 했지만 모반으로 몰리면서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기록된다.

이로 인해 그와 가까운 동인 1천명도 함께 숙청당하는 기축옥사(己丑士禍)가 발생했다.

혁명적인 사상가인 정여립을 두고 당시 서인들이 옥사를 조작해 보복을 당했다는 견해와 실제 역모를 꾀했다는 논쟁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조선말기 전북 고창 출생인 전봉준(全琫準·1855~1895)은 동학농민운동 지도자이자 혁명가로 잘 알려져있다.

몸이 왜소했던 그는 녹두장군이라 불렸다.

서른 중반에 동학에 입문한 전봉준은 제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됐다.

당시 군수로부터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들이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횡포가 그치지 않자 1894년 1월 10일 동학 농민군의 봉기가 시작됐다.

농민들의 위세에 놀란 관군은 전봉준이 폐정 개혁을 골자로 하는 27개조에 달하는 조건을 무조건 수용함으로써 ‘전주화약’이 성립되는 등 성과를 거두었지만 결국 일본군에 의해서 동학군의 봉기는 막을 내렸다.

시대를 멀리 내다보았던 동학의 개혁 사상은 혁명적으로 평가받으면서 전봉준은 영원히 민중의 영웅으로 기록됐다.

조선 후기 판소리 이론가이자 비평가였던 신재효(申在孝, 1812~1884) 역시 전북이 주 활동 무대였다.

고창의 향리였던 신재효는 부유한 집안 환경을 바탕으로 판소리를 지원하고, 판소리의 이론 정립과 비평 확립에 열성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판소리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는데 주력했다.

백성들 사이에서 공연되던 광대들의 소리를 통일해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별가’ ‘적벽가’ ‘변광쇠가’ 등 판소리 6마당으로 체계화했다.

순창 출신으로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인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은 성리학의 탁월한 이론가로 유명하다.

81세의 긴 세월 동안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해 조선 유학의 중요한 주제인 주리론(主理論)을 심화시켰다.

그의 학문은 이념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에도 적극 개입, ‘위정척사 운동’이 태동했다.

이처럼 이념과 현실에서 큰 발자취를 남기며 조선 성리학의 거장이라고 평가받는다.

그의 저서로는 ‘노사집’ ‘답문유편’ 등이 있다.

전북도 관계자는 “전라도 천년 편찬과 함께 우리 지역 인물들의 재평가를 위해 세밀한 조사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설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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