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웅비를 위한 힘찬 날갯짓 시작
새만금, 웅비를 위한 힘찬 날갯짓 시작
  • 설정욱 기자
  • 승인 2018.10.1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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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새로운 천년을 열다 <2>

전라도 천년을 맞이해 새만금이 오랜 잠을 깨고 아시아 물류 허브로서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했다.

역사 학자들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토대로 새만금의 새로운 도약에 관심을 쏟고 있다.

새만금은 김제·만경 평야를 금(김)제와 만경에서 따서 ‘금만평야’라고 불렀고, 이후 ‘금만’을 ‘만금’으로 바꾸고, 새롭다는 뜻의 ‘새’를 붙여 만든 신조어다.

전문가들은 해양문화가 융성한 이곳 새만금을 역사적 인문학의 보물창고로 보고 있다.

특히 새만금 속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는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 물줄기가 바다에서 한데 모이는 곳으로 선사시대부터 동북아 해양문물교류의 허브로서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는 것이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는 ‘새만금 속 한중문물교류’라는 논문을 통해 새만금의 역사를 재조명했다.

해당 논문에 따르면 현 새만금 지역은 한반도의 서북쪽 연안과 중국의 동북쪽 연안을 따라 일찍부터 이용돼왔다.

기원전 202년에는 제나라 전횡이 군산 어청도로 망명했고 기원전 194년에는 고조선 위만이 쿠테타로 준왕을 내쫓자 준왕이 바닷길을 통해 현재의 익산으로 망명한 것으로 파악된다.

고조선 멸망 이후 낙랑, 대방군이 해상무역을 주도했는데 부안의 가야포는 전북 동부권의 가야와 중국 남조의 남제의 교류 가능성에 역사학자들은 무게를 두고 있다.

백제 무령왕릉의 양식(塼築墳 벽돌 무덤)은 남조 양나라의 무덤 양식으로 중국과 교류를 보여주는데 남조와 교류하기 위해서는 새만금 항로 이용 필수라는 것이다.

또한 부안 죽막동에서도 토기, 석기, 철기류 등 다양한 유물 출토되면서 중요 해상 교통로였음을 증명한다고 강조한다.

곽 교수는 송나라 사신단이 거란과 여진 등 북방 유목민족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육로가 막혀 불가피하게 바닷길로 왕복했는데 모두 군산도를 경유하는 사단항로를 이용했다”며 “삼국사기의 김부식도 군산도를 찾아 국가차원의 사신단 영접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강봉룡 목포대 교수 역시 7세기 ‘새만금 바다’에서 ‘동아시아 대전’의 승부를 결정지은 세 차례의 중대 사건(상륙작전 및 해전)을 근거로 새만금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강 교수는 ‘새만금 바다, 고대 동아시아의 해양 허브’라는 논문에서 새만금의 ‘동아시아 해양 허브’ 기능에 주목했다.

그는 660년 미자진(군산) 상륙작전, 663년 백촌강(동진강구) 해전, 676년의 기벌포(장항) 해전이 새만금 바다가 그 배경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강 교수는 “정부가 새만금 환황해 경제권의 거점으로 육성하려는 만큼 새만금 바다가 역사적으로 견지해온 ‘동아시아 해양 허브’의 기능을 21세기에 발전적으로 재현할 기회를 맞았다는 점에서는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전북연구원 박정민 연구위원은 “새만금이 고려시대 대중국 항해로였음은 익히 알려졌지만 그 전후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근거가 나오고 있다”며 “전라도 천년을 맞아 새만금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금 살펴보고 미래 천년의 전진기지로 활용할 방안을 찾는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설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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