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의 어머니와 훈련의 아버지
훈련의 어머니와 훈련의 아버지
  • 정은균
  • 승인 2018.10.11 16: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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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균의 학교뎐 14]

 나는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할 때 신체 조건이 매우 우수하였다. 1929년 입학 당시 경성사범학교규칙에 따르면 보통과생도 및 연습과생도의 선발 원칙이 신체검사와 구술시험이었다. 정원보다 지원자가 많으면 수험생들에게 학과시험을 치르게 하였다.

내가 경성사범학교에 지원한 1929년에는 경쟁률이 매우 높았다. 50명 모집 정원에 730여 명이 몰려 15 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나는 신체검사와 구술시험 외에 학과시험을 치렀다. 1934년부터는 아예 입학고사가 필답고사, 구술시험, 신체검사 세 가지로 확정되었다. 나는 필답고사와 구술시험이 조금 불안했는데, 신체검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경성사범학교 입학고사에서 실시하는 신체검사는 학교 의사가 실시하는 건강진단과 체력조사와 신체 각 부위 검사 측정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몸이 비교적 건장한 편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힘 쓰는 일을 잘 한다는 말을 주변에서 들으면서 자랐다. 그런 우수한 신체 조건과 체력 덕분이었을까. 나는 경성사범학교에 다니면서 체조 교과에서 가장 탁월한 성적을 거두었다. 당시 체조 교과는 신체 각 부를 생리적으로 발육시키고 강건하게 하며, 규율을 지키고 협동을 존중하는 습관을 기르는 데 교수요지가 있었다. 체조 교과 수업은 보통과 5년 동안 주당 6시간씩 이루어졌다. 주당 수업시수가 8시간으로 가장 많은 일본어와 한문에 이어 두 번째로 비중이 높은 교과가 체조였다.

체조 수업에서 주로 배운 내용은 체조, 교련, 유희와 경기, 무도(검도, 유도) 들이었다. 무도 수업에서 ‘무도한계고(武道寒稽古)’라는 이름의 활동을 한 기억이 새롭다. 이 활동은 일 년 중 가장 추운 1월 말이나 2월 초에 추위를 견디는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무도한계고 활동을 하면서 강인한 인내심과 체력을 키워 훗날 국가에 보답해야 한다는 훈육 철학을 주입받았다. 체조 수업의 핵심은 일본 무사정신의 충(忠)과 집단정신을 기르는 일이었다.

집단 정신은 체조 수업을 하면서도 길러졌다. 우리는 수업 시간에 체조를 절도 있게 하는 요령을 반복하여 연습하였고, 학교에서 생활하는 내내 이를 철저히 실천하는 생활을 하였다. 체조의 종류에는 목검을 이용한 검도 체조와 건강 체조와 건국 체조 들이 있었다. 검도 체조는 ‘황국신민체조’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체조는 주회(晝會)에서 실시하였다. 주회는 말 그대로 점심 시간 이후 낮 시간에 실시하는 집단 훈련이었다. 월요일 주회 때에는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나팔대 취주에 맞춰 열병 분열을 하고 체조를 실시하였다. 나팔대는 나팔 18개, 큰북 2개, 작은북 4개, 심벌즈 2개로 이루어졌다. 분열 시 최고 학년인 6학년은 총을 직접 들고 집총 대열을 따랐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건강 체조를 했다. 이때는 요일마다 학년별로 구별하여 참가하였다. 화요일에는 1학년과 2학년이, 수요일에는 3학년 이상, 금요일에는 3학년과 4학년, 토요일에는 5학년과 6학년이 대상이었다. 주회에서는 건강 체조를 중심으로 하면서 황국신민체조(수요일)가 곁들여졌다. 창가나 시국창가를 부르거나 집총 교련 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주회는 “훈련의 어머니”라는 대접을 받으면서, “훈련의 아버지”에 비유되는 조회와 함께 보통학교 규율의 쌍두마차 같은 구실을 하였다. 교사들이 조회에서 강조하는 천황제 이념을 머리로 배웠다면, 주회에서는 이를 몸으로 뜨겁게 체화하는 체력 훈련과 군사 훈련을 펼쳤기 때문이다.

수백 명의 학생이 단 한 명의 사람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서 목검을 절도 있게 휘두르는 장면을 직접 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금방 몸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뜨거워질 것이다. 나는 3학년 이상 보통학교 학생 수백 명이 모여 각자 손에 목검을 쥐고 황국신민체조를 실시한 수요일 운동장 풍경을 앞으로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체조 수업을 받으면서 권력과 상급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는 순간들을 자주 경험하였다. 그런데 이를 더 뚜렷하게 보여주는 수업이 있었다. 바로 교련 수업이었다. 우리 학교는 1926년부터 현역 장교 배속령에 따라 현직에 있는 군인이 교내 군사훈련과 야외 군사강습을 지도하였다. 1929년 보통과 입학 시 교련을 가르친 현역 군인은 보병 제78연대 육군 소좌인 오이와 한(大岩範)이었다.

나는 오이와 한 소좌가 총애하는 모범 학생이었다. 교련 주번 활동을 철두철미하게 이행하였고, 주번일지를 완벽하게 정리하였으며, 각개교련과 분대?소대?중대 교련과 수기(手旗)와 보초와 척후 훈련 등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나는 경성사범학교 보통과에서 5년, 연습과(갑)에서 1년 간 교육을 받으면서 완벽한 ‘학생 군인’ 같은 예비교사가 되었다. 오이와 한 소좌를 비롯한 경성사범학교 교사들은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강력한 보루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체조 교과의 다양한 수업 활동을 통해 군인 같은 학생 만들기 교육에 박차를 가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예비군인 같은 예비교사를 만드는 군사 교육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만주사변이 터진 뒤 우리는 그 전에는 없던 사격예행연습을 실시하였고, 속보와 총검법과 좌우향법으로 세분화한 각개교련 훈련을 강도 높게 받았다.

경성사범학교에서 경험한 학생 군인 양성 교육의 배경에는 좀 더 현실적인 이유도 깔려 있었다. 우리는 조선인 학생들의 저항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분출하고 있다는 소문을 교실에서 자주 듣고 이야기하였다. 언젠가 오이와 한 소좌는 1921년부터 1928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400여 건의 동맹휴학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면서, 예비교사들인 우리가 장차 학생들을 가르칠 때 집단 규율에 순응하고 상급자에게 순종하는 인성을 기르는 데 크게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정은균 군산 영광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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