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시작, 민족만세 운동
독립운동의 시작, 민족만세 운동
  • 이종호 기자
  • 승인 2018.10.07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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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주년 기념 기획취재] 독립운동가 화암 정현섭 선생 발길 뒤따르다[3]

 “적은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도 용감히 싸웠다.

 패배가 뻔히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단 한명의 탈영병도 볼 수 없었다.

 적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것이다.”

 신미양요가 발생했던 1871년. 전투가 끝나고 미 해병대 장교 슬레이 대령은 이 같은 기록을 남겼다.

 신식 무기를 앞세운 미군의 맹렬한 공격에 미군이 3명 전사할 동안 조선군은 350명이 전사하는 참혹한 패배를 당했지만 그는 조선 군인을 자신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가장 용맹한 이들로 기억하며 이 같은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40여년이 지난 이후 그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지키려 했던 조국은 어떻게 됐을까.

 유감스럽게도 청년 정화암이 바라본 조국은 이미 일본에게 빼앗겨 찢기고 발겨진 모습 뿐 이었다.

 김제에서 태어나 정읍에서 유년시설을 보냈던 정화암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로 상경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발을 담갔다.

 당시 20대 초반의 나이였던 청년 정화암이 느꼈던 조국의 현실은 어땠을 까.

 5천년 역사를 이어가며 주변의 수많은 강대국이 수천 번의 외침을 받았어도 굳건히 주권을 지켜왔던 조국이 다른 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한 현실은 뜨거운 심장을 가진 정화암으로서는 참아내기 어려운 모욕이며 굴욕이었을 것이다.

 민족만세 운동이 발생하자 청년 정화암은 상경해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정확히 99년 전 정화암이 3·1운동에 참가해 감격적인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던 옛 종로경찰서.

 바로 옆 건물에는 민족운동의 본거지로써 3·1운동을 준비했다는 종로 YMCA건물이 아직도 남아있다.

 하지만 종로 경찰서 건물은 휴대폰과 귀금속을 파는 1층 가게와 어학원으로 바뀐 2층 등 일반 상가로 바뀌면서 이곳이 역사적인 민족운동이 벌어졌던 곳으로 느낄만 한 정취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건물 바로 앞 지하철 입구에 김상옥 열사의 의거 터임을 알리는 표시판이 있었지만 작고 초라한 모습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우리 독립군을 잡아다가 잔인하게 고문하고 학대했던 민족말살의 상징이었던 이곳을 폭파하고 수백명의 일경과 대처하다가 장열하게 전사한 김상옥 열사.

 김상옥 열사는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 투탄으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남자 6명과 여자 1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큰 소동이 났다. 투탄 당시만 하더라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일본경찰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5일이 지난 1월 17일에 일본경찰은 투탄의 장본인을 알아내고 은신처를 추적했다. 그러던 중 1월 17일 새벽 3시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의 집이 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에게 탐지돼 아래 20여 명의 무장경찰에게 포위됐다.

 하지만 그는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총격전을 벌여 수명의 일경을 사살하거나 중상을 입히고 탈출했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새벽 최후 은신처마저 일본경찰에게 탐지되고 기마대와 무장경관 수백명이 은신처를 중심으로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했다.

 이번에도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쥐고 대총격전을 3시간 반 동안에 벌였다. 구리다경부를 비롯한 10여 명을 살상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탄환마저 다하여, 마지막 남은 탄환 한발을 가슴에 겨누고 벽에 기댄 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자결, 순국했다.

 그가 민족의 울분을 토해냈던 역사적인 이곳을 아무런 흔적도 없이 방치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투사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이곳에서 불과 5km 근방에 있는 서대문 형무소는 역사관으로 조성돼 우리 독립열사들의 혼과 정신을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은 1908년 10월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개소돼 1945년 해방까지 한국의 국권을 되찾기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됐고 해방후에도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민주화 운동 관련 인사들이 수감되는 등 한국 근대사의 굴곡을 안고 있는 상징적인 장소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이전되면서 과거의 아픔을 극복하고 역사적 교훈으로 삼기위해 역사관으로 개관해 자주 독립정신과 평화수호 정신을 기리는 교육의 현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과거 독립투사들을 고문하고 가뒀던 옥사와 사형장 등이 아직도 남아 일제의 만행과 독립투사들의 정신을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정화암은 이 곳 옛 종로경찰서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1920년 미국의회 사절단이 내한했을 당시 일본의 침략상과 학정을 알리는 활동을 했다.

 그가 미 사절단을 만나기 위해 은신하며 활동했던 안국동 일대는 번화가로 조성돼 옛 역사적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화암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그는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게 됐고 다음해 10월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해 본격적인 무장 항일투장에 나서게 됐다.

 

 

 

 

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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