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나키스트 화암 정현섭
한국의 아나키스트 화암 정현섭
  • 이종호 기자
  • 승인 2018.09.30 1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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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주년 기념 기획취재] 독립운동가 화암 정현섭 선생 발길 뒤따르다[2]

 “5분 안에 끝내고, 우린 살아서 돌아갈 겁니다!” 영화 ‘암살에 나오는 비장한 한 마디 대사다.

 소수의 독립투사들이 수많은 일본 경찰을 상대한 1:100 전투. 영화 속에만 있던 장면은 아니다.

 영화 속 거대한 스케일의 액션들은 일제 암흑의 시대에 분명 존재했다.

 1931년 10월 말,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모인 아나키스트 독립투사들은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항일구국연맹’ 을 조직했다.

 그리고 그 연맹에서 정화암, 왕아초, 이회영 선생이 항일구국연맹의 행동부 단체 ’흑색공포단‘을 설립했다.

 이회영, 정화암 선생이 단체를 지휘하고 중국인 왕아초가 재정과 무기 공급을 책임졌으며 기타 단원으로는 백정기, 이수현, 유기문, 이용준, 이강훈, 이달, 엄형순, 양여주, 오면직 선생 등이 있었다.

 아나키스트란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한다. 아나키즘은 모든 종류의 억압과 지배를 반대하고 사회혁명을 통해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정치철학이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지배자가 없고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아나키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아나키(Anarchy)는 ‘통치 권력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나르코스에서 유래한 단어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됐다. 초기 아나키스트들은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착취에 저항하며 국가 권력의 해체를 주장했다.

 또한, 권력 해체를 위해 암살과 같은 폭력적인 혁명을 추구하기도 했으며 그로 인해 과격하고 급진적인 사상으로 간주됐다.

 아나키즘은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며 모든 종류의 지배 권력을 부정하므로 마르크스나 레닌의 권위주의적인 공산주의와도 대립하는 측면이 있다.

 아나키즘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으며 시대와 흐름에 따라 다양한 이론이 공존한다. 통치 권력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한자문화권에서는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한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정부 권력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억압과 지배에 반대하는 사상으로 무정부주의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다.

 한국에서 아나키즘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 이념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1910년 이후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1920년 무렵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을 통해 국내로 빠르게 전파됐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일본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면서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던 정화암은 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 1920년에는 미국 의회 사절단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이들에게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활동을 계획했다.

 이 때문에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면서 1921년에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했다.

 1924년부터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회영, 신채호, 박열, 신성모 등 아나키즘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함께 활동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1920년대 초 중국 상해는 아시아 최대의 국제도시였다.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조계지’라는 이름으로 상해를 갈기갈기 찢어 나누어 가졌다. 그 땅에서 중국인은 더 이상 주인이 아니었다. 상해는 ‘제국의 시대’에 열강에 의해 분점된 비유럽권 세계의 축소판이었다.

 그야말로 제국주의 열강의 욕망이 가감없이 투영되는 장소였다.

 상해는 반식민지 국가 중국의 심장부에 들어선 식민도시였다.

 이곳 상해에는 주상해 일본공사 아리요시를 격살하려 육삼정의거를 기획했던 정화암이 중심에 있었다.

 육삼정의거는 1933년 3월 17일 중국상해에서 정화암을 중심으로 한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 등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이 요리집 “육삼정”(상해시 사포로 소재)에서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를 폭살하려한 사건이다.

 1933년 3월 일본 육군대신 황목정부를 중심한 일본 군벌은 주중공사 유길명에게 4천만원을 주고 열하성을 근거로 반만항일유격전을 전개하고 있는 의용군과 한족의 항일독립군을 공격하고 탄압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협력하기 위해 부일분자와 고급 장성을 매수하려는 비밀회의가 상해 공동조계에 있는 육삼정이란 고급 요리점에서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흑색공포단은 1933년 3월 5일 의사의 숙소인 상해 프랑스조계 정원방(亭元坊)에서 정화암, 원심창, 엄순봉, 이강훈이 회합해 시국을 분석하고 그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육삼정을 습격하여 유길명 등을 처단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김구주석이 상해를 떠나 가흥으로 이동할 때 오면직에게 맡긴 폭탄 2개를 비롯해 중국인 왕아초와 화균실로부터 권총 2자루와 탄환 20발 그리고 수류탄도 1개 더 준비하고 일본군 수뇌들이 육삼정에서 회합을 갖는 것은 3월 17일 오후 9시부터 11시까지이므로 이 시간대에 거사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계획이 사전에 노출되면서 거사 당일 갑자기 덮친 일본군에 의해 거사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상해육삼정의거는 윤봉길의사 의거, 이봉창의사 의거와 함께 한국독립운동사가 자랑하는 해외 3대 의거 중 하나지만 그동안 이 사건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고 그 정신 또한 널리 알려지지 않고있다.

 하지만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바탕으로 우리는 일제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고 36년간이나 일본의 지배를 받았지만 우리민족의 넋과 혼을 지금까지 계승발전시킬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종호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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