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茶房)
다방(茶房)
  • 이창숙
  • 승인 2018.09.3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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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37>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는 다방은 커피와 차를 파는 상업적 공간으로 근대식 다방이다. 각 세대와 개인마다 다른 추억을 만들었고, 다양한 기능을 하며 시대적으로 변해왔다. 커피와 차라는 감성이 깃든 음료를 마시며 낭만에 민감해 질수 있는 공간, 다방은 일본인의 자본을 시작으로 차츰 조선의 문화예술인에 의해 우후죽순으로 생기기 시작한다. 1923년 전후로 일본인 소유의 명동 ‘후타미’가 최초의 근대식 다방이다. 그 후 1927년 ‘카카듀’라는 다방을 우리나라 영화감독인 이경손이 관훈동 입구에 개업한다. 이를 시작으로 영화·연극인과 문인·화가 등에 의해 다방이 각각의 특색을 자랑하며 개업을 하였다. 남성들만이 아닌 신여성들도 참여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영화배우·소설가들도 명동에 ‘비너스’ ‘낙랑’ ‘마돈나’를, 시인 모윤숙은 ‘문예살롱’을, 가수 신카나리아는 ‘모나미 다방’을 운영 한 바 있다. 신여성들이 시를 쓰고 예술을 논하고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시는 곳, 다방은 공적공간으로서 남녀가 만날 수 있는 장소이며 개화의 음료인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었다. 화가 이순석이 연 ‘낙랑’은 인텔리 청년이 성공한 직업란에 소개될 만큼 문인 예술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약속을 하는, 문학과 시와 영화를 만들고 창작을 하는 곳. 노동보다는 예술과 여가를 즐기는 장소가 된 것이다. 우리만의 전통적 공간인 사랑방은 점점사라지고 다방이 대중들의 생활 속 깊이 자리하게 된다.

  이렇게 모여든 명동의 다방, 명동이 개발된 것은 1883년 제물포항 개항이후이다. 개항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상권을 개발, 명동 일대를 ‘메이지마치’라 부르며 상권을 잡았다. 일본인들이 정착을 하면서 명동일대는 빠른 속도로 개발되었다. 1930년부터는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일본식 한자가 혼용된 끽다점(喫茶店)이라는 명칭의 다방도 있었다. 일제는 바, 카페, 다방의 외국식 명칭을 일본식으로 개정하라고 지시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다방 내에 미국, 영국의 레코드사용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매일신보 1942년 12월 30일자에 의하면 “다방에 흐르는 레코드의 멜로디에도 대동아전쟁 체제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레코드와 차를 마시고 손님을 받는 다방에는 오후 다섯시 전에는 절대로 레코드를 걸 수가 없었다. 바, 카페 업자는 가지고 있는 레코드 중에 미심한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은 어떨까하고 한번 소관 경찰서로 가지고 가서 알아본 연 후에 걸어야 하는 등 조합에서는 업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있다. 이곳에서 마시는 음료는 커피 홍차 인삼차 엽차 등이지만 차보다는 음악과 함께하는 커피를 더욱 선호했던 것 같다.

  한국전쟁이후 다방의 역할은 다양해진다. 사람들의 연락소로 전화교환소 역할을 하게 된다. 산업화사회가 되면서 다방은 낭만을 나누는 장소보다는 개인 사무소처럼 변하여 연락이 오가며 개인 업무가 이뤄지는 장소가 되었다. 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을 하는 곳도 있었다. 전시회·문학의 밤·영화의 밤·출판기념회·환영회·동창회·강습회 등이 열렸다. 역사를 간직한 다방이라는 명칭은 오랜 흑백 사진처럼 되었지만 공적 공간으로서 역할은 지금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사실 다방(茶房)이라는 명칭은 역사적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등장한다. 궁중에 설치된 관부로, 소용되는 차와 약·술에 관한 일을 맡았다.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왕실의 의례에 사용되는 차와 다과를 관리하였다. 다방의 관원은 주로 의관(醫官) 출신이 많았으며 의례를 관장하는 관원이 겸직하기도 했다. 이들의 성격으로 보았을 때 당시 차는 약용과 예(禮)의 기능이 컸던 것 같다. 초기에 다방의 관원들은 주로 문관들이었으나 명종 16년(1186)이후 무관이 업무를 겸하게 된다. 다방에 소속된 다군사(茶軍司)는 궐 밖에서 차를 준비하고 운반하는 책임을 맡았다. 조선시대에도 외국 사신을 영접하거나 왕실의 제례를 관장하였다. 물론 다점(茶店)이 있어 차를 사고파는 일이 이뤄졌지만, 이렇게 우리에게 차와 관련된 공간은 조금은 접하기 힘든 곳에 있었다. 근대라는 개화기를 우리 스스로 열었다면 다방(茶房)은 어땠을까.

 

 /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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