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사귀통(處事貴通)의 지혜를 생각해 본다
처사귀통(處事貴通)의 지혜를 생각해 본다
  • 송일섭
  • 승인 2018.09.2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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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에는 ‘처사귀통(處事貴通)’이란 말이 나온다. 이덕무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책을 아주 좋아했다. 오죽하면 ‘책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看書痴)’라는 호가 있을까. 최근 필자는 이 말을 자주 곱씹어 본다. 사소한 언쟁을 하고 난 뒤, 밀려오는 회환의 끝자락에는 꼭 이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의 본뜻은 ‘처사귀통 독서귀활(處事貴通 讀書貴活)’에서 보듯 일과 독서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 준다. 즉 ‘일을 하는 데에는 주변과의 소통을 중시해야 하고, 독서는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일을 도모하는 데 있어 주변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최근 평양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청와대에서는 국회와 야당의 대표에게 동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두 야당은 즉각적으로 거부해 버렸다. 그 이유는 정부의 일방적 처사에 대한 반발이라고 했다.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기에 보다 전략적으로 접근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국가적 대사에 이것저것 따져가며 딴죽 걸기에 바쁘다는 비난도 있었다. 일은 혼자 할 수도 있고, 여럿이 할 수도 있지만, 그 일의 결과는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래서 모든 일에는 주변의 이해와 협력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아주 소중한 교훈을 공유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검푸른 바다 속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는 유가족과 국민들을 분노와 절망에 빠지게 했다. 우선 당장 자신들에게 쏟아질 비판적 여론에만 고민했지, 희생자 구조와 유가족의 아픔과 절망에 대해서는 소홀히 했다. 현장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그 특유의 ‘유체이탈화법’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두고두고 곱씹어 볼 일 아닌가. 즉 거기에도 ‘처사귀통(處事貴通)’의 지혜가 담기지 않았던 것이다.

며칠 전 동아일보에 칼럼에 나온 내용이다. 최근 교육부가 발표한 인사와 관련하여 ‘교육’과 ‘노동’이 얼마나 유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에서조차 ‘교육전문가’가 소외되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교육부는 그 존재감이 없었다. 현장교원과 교육전문가들의 역할을 외면하고 ‘공론화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입시정책을 조율하려 했던 것은 아마추어 수준을 넘지 못한 포퓰리즘에 불과했다.

2004년 1월 학교폭력대책에관한법률이 제정된 이래 학교는 ‘교육기관’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법적 다툼이 일상화되었다. 학교폭력에 대한 교육적 접근, 또는 교육적 배려는 오히려 문제를 더 키우는 단초가 된지 오래다. 법에 따라 판단하고 그에 따라 처벌하는 것으로 교육적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이렇듯 우리사회는 본질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겉치장을 더 중시하게에 바빴다. 대통령 스스로 밝힌 유능한 인재를 발굴해서 적재적소에서 능력을 발휘하도록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누구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자기들만의 잔치’가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게 어찌 정부만의 일일까. 지방선거 이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인사 잡음도 그 연장선이다.

촛불혁명 이후, 우리는 어느 하루 글 배운 자들의 호가호위(狐假虎威)를 듣지 않는 날이 없다. 며칠 전에는 대법원의 높은 사람이 공공연하게 증거를 없애버리는 일까지 일어났다. 일반 시민이라면 벌써 구속되었을 것이다.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열네 차례나 절도를 일삼던 어느 피의자가 서울고등법원에서 재판관을 향해 ‘너희들이나 잘하라’고 일갈했겠는가. 그의 법정 소란을 두둔하고 싶지 않지만, 이는 결국 ‘처사귀통(處事貴通)’을 몰각한 법정의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사법거래’로 일컫는 엄청난 범죄를 구성했음에도 번번이 ‘빠꾸’(영장기각)하는 재판관들을 보면서 일반 국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지금부터라도 본질을 구현하고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 ‘처사귀통(處事貴通)’의 지혜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현되기를 소망해 본다.

 

 

송일섭 (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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