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놀이가 사라진 명절, 추석
전승놀이가 사라진 명절, 추석
  • 최정철
  • 승인 2018.09.17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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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사람들은 곧잘 달을 두고 언약을 한다. 하지만 로미오가 달에게 자신의 사랑을 다지자 줄리엣은 콧방귀 뀌며 변하기 쉬운 달에다 사랑 약속 한다고 핀잔을 주었으니 달이 언약의 증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한 듯하다. 동이족은 그런 달을 두고 축제를 즐겼다. 정월 대보름날과 추석 한가위가 되면 국가적으로 축제 판을 벌였다.

 추석은 동이족 고유 세시풍속이다. 지나(支那)에서는 중추절(仲秋節)이 있거니와 우리네 추석에 빗대어 저네들 것이 원형이라며 어설픈 억지를 부리고 있다. 왜 승려 엔닌(圓仁, 794~864)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이르길, 추석이 되면 신라 유학승들이 추석 명절을 즐기는 조국이 그리워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며 추석은 신라의 명절이지 당의 명절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게다가 수서(隋書)와 구당서(舊唐書) 공히 신라 임금은 추석에 음악을 베풀고 신하들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여 상을 내렸다고 기록하면서도 저네들은 추석에 즈음해서 무엇을 했다는 언급을 일체 않으니 이 또한 증거가 된다. 그러니 이태백이 추석 달 보고 시나 짓던 중에 신라 유학승들에 의해 동이족의 추석이 지나 땅에 스며들어 중추절이 생겨난 것으로 봐야 한다.

 동이족은 추석을 매우 다양하게 즐겼다. 한강 이북지방에서는 사자놀이를 즐겼고, 영남 지방에서는 가배놀이를 즐겼으며 그중 일부 지역에서는 소싸움도 벌였다. 황해 경기 강원 충북 등 중서부 지방에서는 소놀이를 하고, 경기 지방에서는 수신(水神)인 거북에게 거북놀이를 행했다. 제주도에서는 남녀가 편을 갈라 줄다리기(조리지희 照里之戱)를 벌였다. 이 모든 것이 수확 명절인 추석을 맞아 놀이로써 풍요를 기원한 것이다. 호남 지방의 추석놀이는 그저 남해안의 강강술래와 농악놀이만 있었다고 전해진다. 남해안 일부 지역에서 밤에 부녀자들끼리 즐기는 강강술래로는 지역을 대표하기에 한계가 있다. 오늘날 농악놀이에는 지역 고유성을 얹기 힘들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풍요 기원을 품은 호남의 고유 추석놀이는 딱히 내세울 바가 없다. 있었으나 흔적이 사라졌으리라. 아마도 신라가 백제를 병탄한 후 통일신라시대를 이어가는 동안 백제의 풍속을 덮었을 것이고, 고려 때 역시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에 의해 차령산맥 이남이 중용되지 않다보니 풍속까지 존중될 리 없었을 것이다. 속상한 역사 속에 또 다른 속상한 일이 있는 것이다.

 살펴볼 만한 것들은 분명 있다. 일찍이 마한을 중심으로 한 호남 땅에는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이 있었고 그곳에서 매년 한두 번에 걸쳐 천군(天君)을 뽑아 신에게 제사를 치렀다. 또 계음(契飮)이라고 불리는 제천 의식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나 사람들이 모여 특별한 의미의 술을 마시면서 일체감을 공유한 행사로 보인다. 또 백제시대 때는 교천(郊天)이라 하여 해마다 네 번씩 하늘에 제사가 치러졌다. 백제 사람들은 이 교천 의식을 매우 중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교천의 뜻을 헤아리면 ‘나라 밖의 하늘’이다. 귀한 때 날을 잡아 일탈적 행위, 즉 축제로써 모두의 이상향인 천국을 즐긴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제천 의식이라 함은 수확 세시인 추석과 무관할 리 없을 것이니 상기 의식들 중에서 현대적 시의로 품을 수 있는 내용을 추출, 호남 고유의 추석놀이로 개발해봄은 어떨까 싶다. 새로운 콘텐츠로 개발하는 것도 좋고, 기왕 시행해오고 있는 축제 프로그램들을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예컨대 추진위원장을 천군으로 추대하여 현대판 계음일 전주의 가맥 축제에다 소리 축제를 합치고 지역 전승 연희들까지 두루 풀어놓아 이것을 교천 혹은 교천제라고 내세울 수 있지 않을까. 성묘와 가족회합, 송편 먹기만 가지고 추석의 의미를 이르는 것에는 아무래도 허전함이 따른다. 추석용 여흥이라 해봤자 뻔한 민속놀이 체험에 영화관 찾아가는 것이 전부일 것이니 옛 백제의 멋을 되살리는 호남형 추석놀이가 생겨나기를 바래보는 것이다. 전주가 조선의 풍패지향이라 하나 명백한 백제의 고토이기도 한 즉.

 혹은 이런 접근 방식도 있을 수 있다. 백제문화의 맹주라 자칭하는 충청도 부여와 공주가 60억 원 규모의 <백제문화제>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열심히 망쳐가며 백제정신을 증발시키고 있는 것에 눈 궁둥이 시려온 지 오래다. 차제에 무왕을 배출한 익산이 고대 백제의 제천 의식들을 품어서 호남형 추석놀이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어설픈 왕 행렬이나 군사 행렬 재연보다는 그런 것이 진정한 백제정신 계승의 길일 것이다.

 / 글 = 최정철 서울시 한양도성문화제 총감독(『성공을 Design하는 축제실전전략』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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