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강렬한 붉음, 그리고 내장산
기억 속 강렬한 붉음, 그리고 내장산
  • 유진섭
  • 승인 2018.09.16 15: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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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 내가 칠해진 곳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열정이 타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아, 빨강이 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한동안 저 문장이 주는 강렬한 매혹에 빠져 지냈다. 태생적으로 색(色)에 민감하지 못하다. 그러니 어떤 색에도 특별한 감흥이 일지 않는 내게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헌데 돌이켜 보니 빨아들일 듯한 붉은 색의 기운에 휘청거릴 때가 또 한 번 있었다. 고향 내장상동(옛 상동)은 내장산 길목에 있다. 어릴 적 맑은 날이면 서래봉 아래로 붉고 노르스름한 빛들이 어우러진, 고운 단풍이 한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지난 2002년 호남고속도로 내장산 IC(정읍시 입암면 하부리 소재)가 개통돼 교통량이 분산돼 보기 힘든 풍경이 됐지만, 어릴 때는 해마다 단풍철이면 내장산으로 들어가려는 차량과 사람들로 집 앞 도로가 북새통을 이뤘었다.

 강렬한 붉음에 대한 기억은 그 무렵이다. 예닐곱이나 되었을까?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어느 가을날 내장산에 있었고, 바로 위의 형과 동네 친구 몇도 함께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시절은 내장사까지 버스가 드나들었으니 어쩌면 놀이삼아 버스를 탔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하늘은 맑고 투명했으며 가을빛을 머금은 햇살은 빗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온산이 불타고 있었다. 온 몸을 삼킬 기세로 붉은 기운을 뿜어내던 빨강에 대한 기억은 어린 내게 깊숙이 각인됐다. ‘산홍(山紅), 수홍(水紅), 인홍(人紅)’, ‘벽련암을 불태우는 붉은 빛’ 등 숱한 수식어로 내장산 단풍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는 것은 한참을 더 성장한 후에 알았다. 사실, 여러 가지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단풍 빛은 어린 기억 속의 강렬함에 미치지 못한 듯 하다. 일부 관리 등의 문제도 있겠지만 기온변화와 환경오염 등 당시와는 여건이 많이 달라진 점도 큰 이유일 것이다. 또 하나, 서래봉과 불출봉을 떠받치고 있던 바위들은 얼마나 웅장하고 경이로웠던가. 울울창창한 나무들에 가려 그 장엄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더불어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산봉우리와 바위, 나무 등을 전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다면 이 또한 내장산의 색다른 볼거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매년 되풀이 되고 있는 각종 불법행위들이다. 단풍명소답게 가을철이면 약 60만 명이 찾아오고 있으나 많은 이들이 음식점 가격과 서비스의 질 저하, 소음문제 등의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정읍관광의 핵심 공간이 도리어 정읍 관광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진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장소건 사람이건 100% 완벽할 수는 없다. 100만분의 1이라도 나아지려는 노력, 긍정적인 요소를 확대하려는 것 못지않게 부정적인 요인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내장산을 다시 찾고 싶은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편리하고 쾌적한 호텔을 짓고 볼거리와 즐길거리 등 콘텐츠를 확보하는 일,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점점 높아지고 있는 관광객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일이 우선이어야 한다. 이는 정읍관광에 대한 더 이상의 이미지 실추를 막고, ‘가장 한국다운 단풍의 고장 이미지’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올해가 ‘단풍철 불법 행락질서 근절 원년’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미 강력한 의지도 밝혔다. 특히 바가지 요금과 택시 호객 행위, 불법 노점상 행위, 각설이 고성방가와 불법 농특산물 판매 등 관광객들의 불만이 가장 많은 5대 분야는 반드시 근절할 것이다. 관련 부서장을 책임자로 지정했고, 대책 보고회 등을 통해 세부적인 계획도 마련했다. 정읍경찰서와 국립공원관리공단 내장산 사무소 등 유관기관과의 협력과 공조시스템도 갖출 것이다. 상생 간담회 등을 통해 보다 효과적이고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 방안도 지속적으로 찾아 나갈 것이다. 물론 내장산가 번영회와 농업인 등 시민들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유년의 아름다운 기억 속 불타듯 선명했던 단풍이 내장산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감동과 힐링(healing)의, ‘특별한 그 무엇’으로 기억되길 꿈꾼다. 언제든 다시 찾아가도 불쾌하지 않고 질리지 않는, 마음속 영원한 휴식처 내장산으로 남기를 기대한다.

유진섭<정읍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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