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쑤의 한인사회
장쑤의 한인사회
  • .
  • 승인 2018.09.13 20: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직원들 월급부터 꼬박꼬박 챙기는 안형남 박사

 

 일요일 오후 4시, 난징의 무궁화한방병원에서 한창 바쁘게 보내고 있는 안형남 박사를 만났다. 병원에 손님이 매우 많아서 그는 구면인 나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대기실에 TV를 켜놓았는데 중국 선수 천룽(諶龍)의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준결승전을 중계하고 있었다.

 얼마 후 안 박사는 약방에서 나와서 기자를 작은방으로 안내하였다. 그는 1993년부터 난징중의약대학교에서 침구 추나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997년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약 1년 동안 근무하다가 1999년에 동대학원에 진학하였다. 2002년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또 1년 동안 근무하다가 2003년에 다시 동 대학원의 진훙주(金宏柱)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박사과정을 밟았다. 2006년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은 중국에서 취득한 의학학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국내에서 의사로 일할 수 없었다. 1997년 10월, 그는 형님 안진영 씨와 함께 난징에서 무궁화 한국음식점을 개업하였다.

 “무궁화 브랜드는 서울의 저희 안씨 가문이 만들었습니다. 저희는 김치, 떡, 참기름, 배즙, 양파즙 등 천연식품을 스스로 생산하고 가공할 뿐만 아니라 친환경 숯과 천연 돌판으로 구이류 요리를 하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안 박사는 개업하자마자 아시아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고 하였다. 2년 동안 힘겹게 버티고 나서야 음식점은 겨우 정상궤도에 올랐다. 난징의 한식집은 흔히 2, 3년을 하고 폐업하는 경우가 많지만 무궁화 한국음식점은 20년 넘게 운영되었다. 현재 경영실적은 아주 좋고 직원 50여 명을 두고 있으며 난징의 중국인과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을 뿐만 아니라 여러 국제여행사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안 박사는 난징에서 유학하고 경영하면서 가정도 이루게 되었다. 부인은 중국의 동북 출신으로 딸과 아들을 하나씩 낳아주었다. 자녀들은 모두 시엔린(仙林) 난징외국어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딸은 고2, 아들은 고1에 재학 중이다.

 인터뷰 중에 직원이 불러 그는 장쑤성중의원의 명의인 성(盛) 선생님과 같이 환자를 진료하였다. 진료를 마친 후 자리를 옮겨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요즘 눈코 뜰새 없이 바쁩니다. 새벽 4, 5시에 일어나서 저녁 11, 12시까지 일합니다. 목요일과 일요일 오후에는 주로 병원에서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식당에서 일합니다.“ 안 박사는 형님이 중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식당 일을 거의 도맡아 하다시피 한다고 하였다. 저녁 7, 8시에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면 주방에서 설거지를 돕기도 한다고 하였다. 안 박사는 요즘 음식점을 경영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고 하였다. 직원들의 월급만 해도 개업 초반에 400∼500위안 하던 데서 10배나 뛰었다고 하면서 매달 지급하는 월급이 수십만 위안에 달한다고 하였다.

 ”저는 집이 난징에 있습니다. 중국 사람과 결혼했고 애들도 중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난징은 저에게 두 번째 고향이나 다름없습니다. 중국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고 기회도 많습니다. 저는 중의학에 관심이 많고 침구 추나를 좋아합니다. 난징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가정을 잘 돌보고 식당과 병원을 잘 경영해서 직원들의 월급을 제때에 챙겨줄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것 같습니다. 미래 계획이자 사업 목표이기도 합니다.“ 안 박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기자는 안 박사에게 사업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였다.

  리쭝장?李宗長 사진/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