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의 무게
훈장의 무게
  • 조배숙
  • 승인 2018.09.0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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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이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두 해 전, 어느 퇴직 교사가 정부 포상 포기 사유로 밝힌 이유 중 하나다.

 그는 포기 사유서에 “설레는 마음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가 2년이 지나도록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밝히지도 않고 밝힐 의지조차 없는 이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고 썼다.

 34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퇴직하신 한 선생님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의 민 낯 그리고 빛바랜 훈장의 무게가 부끄러웠다.

 3·1운동의 상징적 인물은 유관순 열사다.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그렇듯 1962년에 가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서훈 3등급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를 역임한 것 말고 공적이 두드러지지 않은 임병직에게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서훈 1등급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뿐인가. 김구 선생에 앞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이동녕 선생은 서훈 2등급,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과 전 재산을 바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했던 이회영 선생은 서훈 3등급이다. 원칙과 기준이 무엇인지 의아하다.

 대표적 친일인사로 평가되던 동아일보 창업자 인촌 김성수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서훈 2등급이다.

 올해 초 정부는 인촌의 친일행위를 근거로 56년 만에 서훈을 취소했다. 늦게나마 바로잡을 수 있어 다행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군사쿠데타 등으로 헌정질서를 파괴했던 자들의 훈장 대부분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인혁당 사건 등 고문과 가혹 행위로 숱한 간첩 사건을 조작하고 훈장을 받았던 자들의 서훈도 일부를 제외하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반면, 민주화 유공자에 대한 서훈은 단 한 건도 없다.

 훈장이란 무엇인가?

 국가나 사회에 공로가 뚜렷한 사람에게 국가가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수여하는 것 아닌가.

 국가의 품격과 명예의 상징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훈장은 그 기준과 원칙이 무엇인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남발해온 게 아닌가 싶다.

 국가의 품격이나 명예와는 거리가 먼, 정권의 입맛대로 통치의 한 방편으로 활용해온 측면이 강하다.

 마치 굴곡진 대한민국 역사의 거울과도 같은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대한민국 최고 훈장은 무궁화대훈장이다.

 대통령과 우방원수 및 그 배우자에게 수여되는 무궁화대훈장 1호는 이승만 대통령이다.

 군사반란과 5·18 유혈 진압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서훈은 모두 취소됐으나 무궁화대훈장만큼은 제외됐다.

 “취소할 경우 대통령 재임 사실 자체가 부정된다”는 이유라 한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전례라면 탄핵당한 박근혜의 무궁화대훈장도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 중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리처드 닉슨은 훈장을 받지 못했다. 곱씹어 볼만한 사례다.

 내년이면 3·1운동 100주년, 건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훈장은 오욕의 역사다.

 헌정파괴와 국민기본권을 유린한 반헌법행위자의 훈장은 치욕스러운 역사다.

 뒤틀려 있는 현행 상훈제도의 전면 재검토만이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길이다.

 나아가 상훈 수여자에 대한 전수조사를 통한 재평가도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제다.

 국가가 인정하는 최고의 영예인 훈장을 인터넷이나 골동품 시장에서 무시로 거래되는 초라한 무게로 남겨두지 말자.

 조배숙<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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