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사직서’를 바라보는 불편함, 그리고 아쉬움
‘논개사직서’를 바라보는 불편함, 그리고 아쉬움
  • 송일섭
  • 승인 2018.09.06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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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9월 5일 조선일보에는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논개사직서’라는 신조어가 실렸다. “논개사직서, 미투 반성문...대필에도 유행있네” 라는 기사에 나온 말이다. 최근에 특정인을 고발하며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사직서를 써 달라는 주문이 많은데, 대필 작가들은 이것을 ‘논개사직서’라고 한다는 것이다. 잘못이 많은 자가 불리한 입장에 놓이면 상대 또는 상사의 약점을 들춰내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대드는 경우다. 이렇게 되면 누구도 승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데, 이런 경우에 사직서로 대응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참으로 볼썽사나운 일에 ‘논개’라는 역사적 인물과 연결시켜 쓴 말이라니 참으로 황당한 일 아닌가.

필자는 이 말을 신문에서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논개사직서’라는 말에는 우리들의 천박한 역사인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전라북도 장수와 경상남도의 함양과 진주시에는 논개 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는 시민들이 많다. 이 지역의 시민대표들이 함께 모여 논개의 ‘애국충절’을 이 시대의 ‘국혼(國魂)’으로 이어가자던 지난해의 결의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논개가 누구인가. 그녀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최경회 장군의 후처였다는 점과 촉석루에서 벌어진 왜의 전승기념 잔치에서 왜장(倭將) 게야무라 로꾸스꿰를 유인하여 적장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는 사실이다. 승리해 도취된 왜놈들이 진주성 안에서 온갖 만행을 자행하고 있을 때, 숨죽인 조선의 사대부들은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당시로서는 너무나 처참한 패배였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열아홉의 가녀린 여인네가 전진 깊숙이에서 왜장을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걸어 껴안고 죽게 하였으니 만고의 충절 아니었던가. 패배의 늪에 빠져 숨죽인 조선 백성들에게 모처럼 듣는 쾌거 아니었을까. 지금도 논개는 그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애국 열사 아닌가.

그녀의 출생지인 장수와 의거지인 진주, 유허지인 함양 사람들은 해마다 논개를 ‘불멸의 충절’로 숭앙하면서 그녀의 기일에 맞추어 ‘논개 따라 삼백 리’ 라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에도 지난 8월 18일에 장수와 진주, 함양과 산청, 화순과 전주, 대구 사람들이 진주 촉석루에서 출발하여 함양의 방지마을에 있는 논개의 묘를 거처 장수 의암사에 이르기까지 삼백 리 길을 순례하면서 그녀의 충절을 기리고 흠모하였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기녀’로 기록된 것으로 그녀를 기녀로 묶어둔 것에 대하여 출생지 장수에서는 매우 안타깝게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논개 정신의 본질은 그것 또한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애국 충정이다. 그녀가 보여준 조선에 대한 사랑의 마음과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 충절이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 국민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추모하고 있으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그의 충절을 노래하고 사랑하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진주 촉석루와 장수의 의암사와 생가인 주촌마을에는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그녀의 충절 앞에 옷깃을 여미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민족정기와 시대정신을 의연하게 보여준 ‘논개’의 이름을 구린내 나는 상황에 붙여 쓰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일보에 소개된 ‘논개사직서’라는 말은 우리의 몰상식을 유감없이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논개의 충절을 막가파식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무모함과 병치하여 쓰고 있는 사실은 씁쓸함을 넘어 분노까지 치밀게 한다.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천박한 인식이 어떻게 논개 정신과 통한다는 것인가. 직장 또는 조직의 잘못과 부당함을 지적하여 이를 고치고자 한다면 참으로 당당한 일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부정과 부패’는 죽고 ‘정의와 진실’을 살리는 의인이기에 절대로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상황은 오지 않는다. 자신의 구린내를 상대와 그것과 희석시키면서 똑같이 잘못이라고 하는 것처럼 무책임한 것은 없다. 논개의 삶 그 어디에도 그렇게 천박한 공멸은 없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점은 또 있다. ‘논개사직서’라는 말을 쓰면서도 언론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 것 같아서다. 그 기사의 내용은 ‘최근 우리 사회에는 대필(代筆)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제목은 ‘논개사직서...’로 시작했다. 기자 두 명의 이름으로 쓴 기사여서 더 안타까웠다. 천박함이야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그에 부응하듯 그 생소하고 괴이한 말을 제목으로 뽑은 것은 부적절했다. 언론은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언어로 대중의 감정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언론에서 쓰는 말은 더욱 정제되고 세련되었으면 한다.

 

 

송일섭 (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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