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에 칼을 차고 수업하는 교사들
허리에 칼을 차고 수업하는 교사들
  • 정은균
  • 승인 2018.09.0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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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균의 학교뎐 12]

일제 강점기 학교는 상명하복에 따라 움직이는 군대 같은 곳이었다. 교사들은 군인과 다름없었다. 교사들은 조선총독부의 무단통치 기조에 맞춰 군복 같은 통일된 복장을 입었다. 수업을 하기 위하여 교실 교단에 오를 때 그들의 허리에는 ‘세이버’라고 부르는 환도(還刀)가 매여 있었다. 학생들은 일방적인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교련 수업과 병식체조 활동을 하면서 집단적인 군사 기술을 익혔다. 예를 들어 1929년 경성사범학교에서 사용한 교련 주번일지 기록을 보면 각개교련, 분·소·중대, 교련, 수기, 보초, 척후, 조교 분·소·중대장 등 군대 용어들이 가득차 있다.

학교에서는 체벌과 폭력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어로 이루어진 수업은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주입식 설명이나 일방통행식 강의로 진행되었다. 교장은 왕처럼 군림했고, 교장의 명령과 지시가 수직적인 위계 구도를 따라 교사와 학생들에게 하달되었다. 교사와 학생을 군인화하고, 학교를 병영화하며, 권력자와 상급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순응시키기 위한 학교교육 시스템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최종 목표는 ‘식민지 노예 양성’이었다. 그 과정에서 일등공신 노릇을 한 것이 학생훈육 시스템이었다. 1921년 일제 시기 최초로 설립된 관립사범학교인 경성사범학교의 학생훈육 시스템을 통해 ‘식민지 노예 교육’의 초창기 정립 과정을 추적해 보자.

경성사범학교는 평양과 대구에 관립사범학교가 세워지는 1929년까지 유일한 관립 교사 양성 기관이었다. 학교 규모나 교육 활동 측면에서 당시 학교교육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한다. 나는 학교에서 실시되는 학생훈육이 교사의 심성과 태도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점을 고려할 때,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학생훈육의 기원적인 상을 경성사범학교의 학생훈육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교육학교과서>에서는 훈육, 곧 훈련을 “생도를 지도하여 일정 규율에 따라 행동하게 하고, 또한 그 심정을 수련하여 호선증오(好善憎惡)의 마음을 생기게 하고 이를 궁행(躬行) 실천하는 습관을 양성하는 교육의 방법”이라고 정의하였다. 이와 같은 훈육을 위해 경성사범학교에서 가장 중시한 교과가 수신과 체조였다.

일제 강점기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의 수신교과서 1118개 단원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각 덕목별 단원 비율이 칙어?칙서 3.8퍼센트, 왕숭배 7.9퍼센트, 근로주의 9.3퍼센트, 제국주의 순종 45.5퍼센트, 봉건 유교윤리 16.5퍼센트, 동화교육 12.3퍼센트, 반민족주의 3.2퍼센트 순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경성사범학교에서는 이와 같은 수신 교과 단원들을 1주일에 1~2시간씩 실시하였다. 또한 수신 교과에서 배운 내용을 실천하기 위해 교내에 왕 사진과 교육칙어 등본을 보관하는 어영봉안소를 세워 매년 어영 하사 기념식을 치렀다.

어영봉안소와, 생도 어영봉안소 청소에 대한 심득(心得)을 보면, 어영봉안소가 신성한 공간처럼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봉안소의 자물쇠는 학교장이 보관하였으며, 국가 기념일인 4대 명절이나 필요한 때 외에는 절대 열고 닫지 않았다. 비상 시에 어영을 옮겨야 할 경우 경비반장이 무장 생도 6명이 동원되었다. 봉안소 부근에서는 산보나 유희, 또는 수목을 꺾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직원이나 생도나 아동은 봉안소 경내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며, 의식을 치르기 위해 경내로 들어간 때에는 봉안소 정면에서 최경례(崔敬禮)를 해야 했다.

봉안소 청소는 생도들이 매일 아침 날씨에 관계 없이 돌아가며 했다. 휴일인 일요일에도 기상 시부터 약 20분 간 기숙사생들이 맡아 실시하였다. 생도들이 청소를 할 때에는 일정한 법도에 따라야 했다. 청소자는 봉안소 앞에 정렬하여 최경례를 한다. 청소용구를 수위에게 교부받는다. 청소를 마친 뒤에는 봉안소 앞에 정렬하여 봉제가를 부르고, 다시 최경례를 하였다.

일제 강점기 학생훈육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군사교련 수업이었다. 교련은 일제 패망 이후에도 1980년대 폭압적인 군사독재 시기까지 꾸준히 이어질 정도로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교련 수업은 국가가 학교를 통해 학생들을 집단적으로 통제할 때 가장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경성사범학교에서 군대식 교련 수업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부터였다. 일본인 현역 장교가 학교에 배속되어 군사훈련과 야외 군사강습을 실시하였다. 교련 수업 당번은 모든 생도가 돌아가면서 맡았다. 당번은 교련 실시 전날 교련 교관에게 가서 다음날 과목과 복장을 파악하고, 이를 당일 생도에게 전달하였다. 당번이 출석을 확인한 후 교관이 입장하면 “제○ 학년 ○조, 총 인원 ○명, 결석 ○명, 현재 인원 ○명”이라고 보고하였다. 군대에서 실시하는 점호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교련은 실질적인 군사교육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1929년 경성사범학교 생도들은 각개 교련, 분대·소대·중대 교련, 수기(手旗), 보초, 척후 훈련을 받았다. 1934년에는 사격예행연습이 추가되었고, 각개 교련에 속보와 총검법과 좌우향법이 추가되면서 더 구체화하였다. 이와 같은 기본 훈련 외에 보병 제78연대장과 제20사단장 등 현역 군인들이 참관하는 ‘교련 사열’, 1926년 이후 매년 교외에서 연 군사 강습, 7월이나 10월이나 12월에 생도들이 부대에 입소하여 1주일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부터는 사격 예행 연습이 추가되고 국기(國旗)가 포함되는 등 군사 훈련과 군국주의적 훈육을 더욱 강화했다.

 

 

정은균 군산 영광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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