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에서 창조와 비창조의 문제
현대미술에서 창조와 비창조의 문제
  • 이태호
  • 승인 2018.09.04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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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라는 개념은 완전한 무(無)에서의 창조와 유(有)에서의 창조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오직 신(神)만이 가능하고 후자가 바로 예술에 해당한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후자 역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창조’라는 개념은 독창성, 원본성, 창작력을 일컫는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남의 작품에 대한 모방이나 표절의 문제는 미술사의 오랜 관행이던 ‘오리지널리티’라는 신앙 때문에 똑같이 베끼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현대미술에서 예술적 창조는 완전한 무(無)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있는 것, 남이 행한 것에 새로운 것을 가미하고 또 기존의 것을 거부해 변화를 주고, 변화를 행하는 과정에서 변형을 만들어 내고 이렇게 만들어진 변형을 자신만의 것으로 완성해 나갈 때 작가의 창조성과 독창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현대미술에서는 ‘창조’의 문제만큼이나 ‘선택’의 문제가 중요시되고 있다. 1917년 미술사에는 획기적인 사건 하나가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변기’ 사건이다. 공장에서 생산해낸 남성용 변기에 ‘샘(Fountain)’이라는 작품 제목을 붙이고 ‘R. Mutt’라는 가명(假名)으로 작품을 출품했던 마르셀 뒤샹은 대량으로 생산되었던 사물인 ‘변기’라는 오브제를 예술작품으로 제시한 최초의 작가로 현대미술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그 당시 마르셀 뒤샹 역시 낙선의 영광(?)은 물론이고 비평가들로부터 심한 혹평과 함께 난타를 당하였다. 하지만 잘 그려진 그림이 판을 치고 있었던 그 당시에, 뒤샹은 과연 그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고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의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본래 ‘작품’이라는 뜻의 ’work‘에는 ‘작품’이라는 뜻의 명사와 ‘제작한다’라는 동사를 함께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예전에는 작가가 실제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가 기본적인 예술행동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현대미술에서는 이러한 제작 과정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더 중요하게 ‘선택’의 문제, 즉 ‘작가의 의도가 개입된 결정’의 문제가 대두하고 있다. 이렇게 작품의 제작이 아닌 선택의 문제가 중요시되는 이유는 작가가 직접 제작하지 않은 작품에는 이른바 ‘독창성’이나 ‘유일성’ 등이 결여되어 있다고 치부해버리고, 그런 작품은 진정한 예술 작품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모더니즘적인 편견을 바로 마르셀 뒤샹이 해체해 버렸기 때문이다.

 마르셀 뒤샹은 눈속임 회화, 즉 시각적 환영의 허구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과를 똑같이 그림으로 그린다고 해도 그 그림이 진짜 사과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은 단지 그림일 뿐이고, 결국에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미술의 체계를 세우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이처럼 뒤샹의 변기는 예술작품을 억압적 패러다임으로부터 해방적 패러다임으로 변형시킨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당시의 사람들 눈에 뒤샹은 분명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나 혹은 충분히 제작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가 했던 행동은 단지 ‘샘’이라는 작품 제목을 정하고 작품에 직접 쓴 ‘R. Mutt’라는 가명으로 된 사인(sign)뿐이었다. 변기 자체도 그가 제작했던 것도 아니었고 공장에서 생산된 수 만개 중의 하나만을 선택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의도된 행동을 통해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 가령 ‘예술 작품과 독창성’에 대한 문제, ‘창조와 비창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이것은 결국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문제로 귀결되고 있다.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창조해 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예술가에게 완성이란 어쩌면 다다를 수 없는 것이며, 작품은 늘 미완성으로 이어지는 변화의 증언이며 흔적일 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은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늘 질문을 던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작가 끌로드 비알라의 언급처럼, 작가가 하나의 틀에 사로잡혀 변화를 거부할 때,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대답과 해답을 주려 할 때, 작가는 창작자가 아닌 생산자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이태호<익산문화재단사무국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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