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 머리에 목총 든 학생들
상투 머리에 목총 든 학생들
  • 정은균
  • 승인 2018.08.23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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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균의 학교뎐 11]
 일제가 만든 교육 칙어는 식민지 조선 교육의 향방을 가늠하게 하는 나침반이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 학교들은 교육 칙어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학생들의 몸과 정신을 통제하려는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집단이 강제하는 규칙과 질서에 순종하고, 권력자나 상급자의 지시와 명령에 복종하는 군대 병영식 학교규율 시스템을 촘촘하게 작동시켰다. 천황제 중심의 “국가주의인 동시에 애국주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교육 칙어라는 날실이, 군대식의 엄격한 통제와 관리에 초점을 맞춘 학교규율이라는 씨실과 교직하면서 식민지 조선 학생들을 순치하였다.

 그런데 조선 학생들의 머리와 가슴은 이미 그 전부터 국가에 기꺼이 지배당할 수 있는 ‘준비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나는 1800년대 이후 1910년까지 전개된 체조 수업과 교련 활동과 병식체조(兵式體操)의 경험들에 주목하려고 한다. 1895년 고종이 교육입국의 대망을 담은 교육조서를 공표한 이후 대한제국의 근대학교들에서는 다채로운 활동들을 시도하면서 과거와 다른 학교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학생들의 신체와 정신에 고도의 집단주의와 획일주의를 각인시킬 수 있는 체조와 교련과 병식체조 들이 그것이었다.

 ‘체조’가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1881년 파견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신사유람단)의 조사(朝士) 조준영이 남긴 <문부성>과 이원회가 남긴 <일본육군조전> 등이라고 한다. 1880년대 초반 일본에 파견된 유학생들도 체조 수용과 보급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 것 같다. 이후 1880년대 우리나라 군대에서 신식 군사훈련을 할 때 제식 활동의 하나로 일본식 군대체조를 가르쳤다. 체조가 신식학교에서 정식 교과로 채택되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였다. 최초의 선교계 사립학교들인 언더우드학당, 이화학당, 배재학당 들이 주도적인 구실을 담당하였다.

 언더우드학당에서는 체조 수업을 매일 제1교시에 30분 간 편성하여 실시했을 정도로 비중이 컸다. 여학교였던 이화학당에서는 15년간 당장직을 유지하며 학당의 세를 불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페인(J. O. Paine)이 학생과 학부모와 관청의 반대를 무릅쓰고 체조를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 이화학당에서는 딸을 데려가겠다는 학부모들이 학당 안으로 몰려들고, 관청(한성부)에서 체조과 폐지를 요구하는 공문을 계속 보내는 등 여학생들이 체조를 배우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가 높았다.

 1880년대의 체조 수업은 정신과 육체의 조화로운 발달이라는 ‘교육적’ 의미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을 기점으로 체조 수업의 양상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최초의 사립학교를 대표하는 배재학당에서는 1894년부터 체조시간에 군사훈련 성격의 교련을 실시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학생들은 상투머리에 모자를 쓰고 전통복장을 한 차림으로 아펜젤러 당장이 만든 목총을 멘 채 가두행진을 했으며, 일본말을 한국어로 바꾼 구령을 사용했다고 한다. 배재학당의 교련 수업은 당시 본격화하기 시작한 외세 침략에 대응하려는 사회의 요구가 일정하게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교육적 의미가 짙은 체조 수업에서 사회적 분위기나 요구에 부응하는 교련 수업으로 성격이 바뀐 체조 교과는 이제 병식체조라는 새로운 형식과 접목한다. 병식 체조는 체조 교과의 하위 교수영역 중 하나로, 일본에서 등장한 용어였다. 병식 체조가 우리나라 학교에 처음 수용된 것은 1895년 한성사범학교와 소학교 교과과정에서였다. 갑오개혁 당시 조선 정부에 파견된 일본인 고문들의 영향이 컸다. 병식체조는 역사적인 변천 과정을 거친다. 1906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주로 관립외국어학교와 공립소학교 등 관공립학교에서 병식체조를 실시하였다. 1906년 이후부터는 민족계와 외국 선교계와 초·중등 학교급을 막론한 사립학교들에서 병식체조를 가르쳤다.

 당시 사립학교에서 실시한 병식체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깨에 멘 목총, 열을 맞춘 구보, 나팔소리에 따라 진행하는 대열 행진, 기계체조, 격렬한 모의전투 들이 병식체조 시간에 실시하는 구체적인 활동들이었다. 절대 복종과 벌을 수반하고, 엄격한 규율 아래 움직이는 군대식 훈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병식체조를 익힌 학생들은 왕 앞에서 군사훈련 시범을 보이고, 국가의례 형식을 갖춘 대규모 연합운동회에서 공개적인 집단시범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병식체조는 단순한 교과 활동의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는 병식체조를 주로 실시한 학교들이 1906년을 기점으로 관공립학교에서 사립학교로 크게 바뀐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한 때가 1905년이었다. 그 이후 위기에 처한 국가와 민족의 기운을 회복하기 위한 목소리와 노력이 곳곳에서 분출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분위기에 정확하게 부응하는 것이 병식체조였다.

 실제 병식체조는 왕을 중심으로 국가를 하나로 묶는 사회적 기능 외에 국권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전사 양성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가졌다. 군사훈련에서와 같은 엄격한 기율 아래 집단적이고 통일적인 동작과 행동을 반복적으로 훈련하면서 국가 의식이나 민족적 일체감을 고취시켰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병식체조를 담당한 교사들이 대부분 사관 양성 교육기관을 졸업한 위관급 이상의 국내외 군인들이었다는 점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나는 대한제국 시기 학교들에 널리 퍼진 체조 수업과 교련과 병식체조 들의 경험이 우리나라 근대학교의 발달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시와 명령에 따른 일사분란한 행동과 동작, 상명하복에 따른 순응과 복종의 정신 들이 당시 학교 특유의 엄격한 규율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나라가 국권을 완전히 침탈당한 1910년 이후 각급 학교들에서 전근대적인 천황제 중심의 교육칙어에 기반하여 식민 통치 교육을 효과적으로 실시하기 위한 학교규율을 정립하는 과정에 그대로 이어졌다.

정은균 군산 영광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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