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마을을 다녀오며
만해 마을을 다녀오며
  • 김창곤
  • 승인 2018.08.1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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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1879~1944)의 뒷모습이 외롭다. 백담사 아래 만해마을에서 12일 그를 만났다. ‘만해대상’ 시상식 날이었다. 두루마기 차림의 훤칠한 청동상은 그를 기리는 만해문학박물관 창문 너머 실내를 바라보며 걸음을 딛는다. 문학박물관엔 그의 유묵(遺墨)과 원고, 저작들이 단정하게 진열됐다.

풍상세월 유수인생(風霜歲月 流水人生). 만해는 고난의 세월을 붓으로 써내려갔다. 그의 시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 ‘사랑하는 까닭’에서 애절한 민족주의와 자유·평화사상을 읽는다. 부산의 문인은 최남선이 쓴 3.1독립선언서 전문(全文)에 만해가 붙인 공약 삼장을 줄줄 외웠다. 그러면서도 아내와 갓난 아이를 두고 출가한 가장 한용운의 매정한 행장을 떠올린다.

만해대상은 불교계와 동국대, 강원도, 조선일보 등이 만해축전의 꽃봉오리로 함께 제정했다. 그 중심엔 지난 5월 입적한 무산 오현스님이 있다. 오현은 빈부귀천의 문턱 없이 살면서 “도(道)도 깨달음도 없다”던 ‘가짜중’이었다. 그는 “부처가 되려 하지 말라. 부처로 살면 부처가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만해대상 시상식 열기는 복더위만큼 뜨거웠다. 문예부문 대상을 받는 고하(古河) 최승범 시인과 함께 기쁨을 누리러 전주의 선배·지인들과 동행했다. 고하는 “미수(米壽)의 나이에 상이 괴롭다”면서도 표정은 들떠 있었다. 전북 문학을 세운 그는 남원에서 태어나 고향의 학교들을 다니고 가람 이병기로부터 시조 문학을 배운 일, 전북대에서 제1회 총장상을 받던 일들을 소년처럼 자랑스럽게 떠올렸다.

돌아오던 차 안에서 지인끼리 미당 서정주를 놓고 작은 입씨름이 벌어졌다. 고창 미당시문학관에선 그의 시를 기리는 국화축제가 매년 열리지만 몇 편의 친일시는 문학사에 오점이 됐다. 그는 생전에 “일제가 패망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인간 서정주는 생활고에 허덕이는 남루한 시인이었다.

고창은 미당과 함께 ‘친일파’로 낙인찍힌 인촌 김성수와 수당 김연수 형제도 낳았다. 형제는 일제때 동아일보와 고려대, 중앙중고, 경성방직, 삼양사를 세웠다. 해방 전 경성방직은 지금의 삼성이었다. 기업과 농장을 만주까지 진출시키면서 가난한 조선인들에게 일자리를 줬다. 그들은 오늘의 기업인처럼 조선총독부의 인·허가를 받아야 했고 때론 도움도 청해야 했다.

광복절을 맞아 여느 해처럼 ‘친일 잔재 청산’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150여년 전 지은 인촌생가는 문화재로 평가받아 1977년 전북도기념물로 지정됐으나 최근 이를 해제하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정부는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에게 내렸던 건국공로훈장을 지난 2월 박탈했다. 시민단체는 김연수의 호를 새긴 전주종합경기장 정문 현판을 13년 전 떼어냈다. 전주종합경기장은 1963년 전국체전을 앞두고 당시로선 거액인 3,000만원을 수당이 기부하면서 건립됐다.

8.15는 일제 억압에서 벗어나 민족 자존심을 회복한 감격의 날이었다. 해방은 그러나 생활을 보장하지 못했다. 행정과 금융, 생산과 유통이 마비되고 생필품을 구하는 일부터 막막해졌다. 1년 새 도매물가가 28배 뛰었다. 해방 전 제조업의 94%가 일본 자본이었고, 기술자의 80%가 일본인이었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에도 기업체 수는 60%, 노동자는 70%, 생산은 80%가 줄어 있었다. 불안과 고통 속에서 계급 없고 착취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구호가 무성했다.

독립운동가 한용운은 친일파로 지목받는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조선일보에 그의 첫 소설 ‘흑풍(黑風)’을 연재했고, 고정 칼럼도 썼다, 방응모는 만해의 만년 거처였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을 지을 때도 돈을 보냈다.

1910년 한일합방을 건의한 일진회의 주축은 동학교도였다. <백범일지>는 춘원 이광수의 윤문(潤文)으로 후대에 널리 읽히는 책이 됐다. 친일을 비호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과 세계는 부조리한 다면체다. ‘정의’는 그리 간단치 않다. 만해의 뒷모습에서 인간의 여러 면모를 읽었다. 올해 만해대상 수상자들의 뒷모습이 한결같이 만해를 닮아 있었다.

김창곤<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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