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하문학관, 이대로 두어야 하는가
고하문학관, 이대로 두어야 하는가
  • 김창곤
  • 승인 2018.07.26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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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들이 누구를 기다리는가. 전주 고하(古河)문학관 2층 서고를 내려오며 탄식을 누른다. 30여평 서고에서 한국 문학의 지난 세기를 추억했다. 최남선 김억 이상화 김기림 채만식 김광섭 신석정 서정주 박목월 정지용…. 빼곡한 서가에 국문학사의 숱한 거장들이 어깨를 대고 있다. 조선 유가(儒家)의 문집과 역사서 지리지 백과사전만도 1,000여 권이다. 두시전집(杜詩全集) 25책도, 송하진 전북지사 할아버지의 문집 8권도 이곳에 있다.

 책은 서고를 넘쳐 문학관 뒷마당 컨테이너까지 채웠다. 모두 4만5,000권. 항온·항습 설비를 못 갖춘 고서 서가들엔 벌레를 막고자 칸칸이 좀약을 얹었다. 국문학자인 고하 최승범 시인이 평생 모아 전주시에 기증한 것들이다. 서지(書誌)에 까막눈인 필자는 이 책들이 귀한 건 알아도 그 가치를 헤아리지 못한다. 경매장에서 최남선의 <백팔번뇌>를 들고 “1926년 간행된 한국 최초의 개인 시조집”이라고 외치면 그 가격이 매겨질 것이다.

 문학관은 간판뿐이다. 건물 전체가 침묵의 공간이다. 아이와 손잡고 한옥마을을 걷다가 문을 연 부부가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다. 1층 텅 빈 홀을 마주하며 당황한 것이다. 구석에 쌓아둔 의자들이 한때 사람이 모였음을 일러준다. 옛 동사무소의 실내를 개조한 이곳은 문학과 책의 납골당이었다.

 시 한 편, 소설 한 권에 세상이 들썩이던 때가 있었다. 청춘들은 아름답고 슬픈 시를 암송했다. 문학은 꿈이고 피안(彼岸)이고 해방구였다. 책이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을 지닌 이도 많았다. 책과 작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으스대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문학과 책이 종말을 향하고 있다. 1996년 5,378곳이었던 전국 서점은 지난해 1,536곳으로 줄었다. 서울 지하철 찻간에서 책은 물론 신문마저 자취를 감췄다.

 스마트폰을 열면 공짜 지식과 정보가 넘친다. 영상과 게임만으로도 여가는 빠듯하다. 한국의 성인 셋 중 한 명은 책을 한 해 한 권도 읽지 않는다. 종이로 된 것은 서류도 통장도 일상을 떠났다. 사람들이 쉽게 분노하고 좌절하고 잊는 까닭이 책을 읽지 않고 시를 외우지 않는 데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책은 이제 그 그림자만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빈 점포가 늘던 서울 강남 코엑스 몰은 도서관 하나로 북적인다. 지난 1년 2,100만 명이 이곳 ‘별마당 도서관’을 찾았다. 책을 읽는 이도 있지만 13m 높이의 대형 책꽂이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도 많다. 이 도서관은 책 7만권으로 코엑스의 랜드마크가 되고 ‘만남의 장소’가 돼 상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필자가 고하문학관을 다시 찾은 것은 미수(米壽)의 고하 시인이 내달 12일 만해대상을 받는다는 소식에 접하면서였다. 만델라와 달라이라마 DJ, 그리고 벽안의 소록도 천사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수녀가 받은 상이다. 이 상 세 부문 중 하나인 문예대상을 이번에 공동 수상하는 캐나다의 대학교수는 한국 소설 150여편을 번역해 세계인에게 읽혔다.

 고하는 품격과 줏대를 지닌 전주의 마지막 선비다. 대폿술 자리에서 시 쓰는 스스로를 딱히 여겨 무심코 던진 후진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시라도라니!”라고 꾸짖던 스승이다. 그 앞에선 누구도 쉽게 지갑을 열 수 없다. 전북대 교수를 정년퇴임한 그로부터 시·수필을 거저 배운 시민만 1,000여명이다. 지난봄 281호를 간행한 국내 최고 지령(紙齡)의 동인지 <전북문학>도 그의 노고에서 비롯됐다. 평생 고향에 머물며 준엄하고 치열하고 겸허하고 따뜻하게 문학을 받들어온 그를 알아준 만해대상 심사위에 전주시민의 한 사람으로 그저 감사할 뿐이다.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문학관을 나서며 한 시인의 시구를 떠올렸다. 문학과 책은 몰락했으나 사라질 수 없다. 세상이 소용돌이칠수록 그 빛은 선명하다. 고하 시인이 물려준 서책은 전주의 자존심이다. 문학관은 수백 점의 그림과 그가 주고받은 수천 통의 편지도 간직하고 있다. 필자는 이 문학관에 사람이 넘치기를 원하지 않는다. 전주시민과 한옥마을 방문객이 잠시 머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빠듯한 예산, 민원 챙기기만도 바쁜 전주시장과 전북지사부터 뜻에 공감해주길 바란다.

 김창곤<전북대 산학협력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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