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서훈 단상(斷想)
독립유공자 서훈 단상(斷想)
  • 최규홍
  • 승인 2018.07.2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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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말기 당대 최고의 산림학자 연재 송병선은 원래 회덕 사람으로 병자수호조약 이후 임피현 고봉산 심산유곡 낙영당(樂英堂)에 와서 후진양성을 위해 계몽활동을 했다.

그는 처 완산이씨의 묘를 회덕현 남성치에서 임피현 술산(戌山)의 혈맥인 꽃달메산(술산리 383-1번지)으로 이장을 했다. 그가 을사년에 순절 후 1906년 7월에 동생 송병순이 쓴 행장(行狀)에서 부모의 묘소가 축성산(임피면 축산리)에 모셔져 있음이 언급되고 있다.

실제로 임피면 축산리 산124번지에는 연재 부모 묘소가 모셔져 있어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 송병선의 임피 사랑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연재 선생이 을사년에 순절후 금산에 모셔져 있던 그의 묘가 술산의 부인 묘와 합장했던 이유는 유위, 전지수 등 이 고장 유림들의 영향력과 복구형 술산이 풍수지리상 명당였기 때문이다.

1901년(66세) 4월 연재의 낙영당 강회에 1906년 6월 태인 의병을 이끌었던 면암 최익현 선생이 참석했고 중기 의병전쟁에 참여했던 최제학, 전해산, 이석용 등도 같이 이 강회에 참석해 감명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연재 선생이 전국백일장대회를 열어 호남 유생들의 학문을 넓히는데 크게 공헌했다는 편액의 기록도 남아 있다.

 연재 송병선은 국망의 통분을 이기지 못해 12월 29일 고종께 유소를 남기고 다음날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순절했다. 을씨년스럽던 추운 겨울날 국망의 시기에 수사로만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죽음을 선택한 송병선의 춘추대의 정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자결은 혼자만의 일로 끝나지 않고 얼마 후 27세 시비(侍婢) 공임이 목을 찔러 자결했고 경술국치 2년 뒤인 1912년에 아우 송병순 마저 춘추대의를 지켜 순절했다.

 송병선은 생전에 임피현에 와서 유림들에게 계몽의 강회를 통해 위정척사 사상을 설파하여 호남의병의 창의에 불을 지폈고 3.1운동, 1927년 옥구농민항일항쟁으로 이어지게 했다.

  필자는 역사를 연구한 학자는 아니지만 작년 가을에 고향의 폐역 임피역사를 활용해 연재 송병선의 맥과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 실험적으로 ‘제1회 임피향토사문화전’ 을 개최하였다.

연재 송병선, 의병장 문형모, 춘고 이인식, 현곡 양일동 등 이 지역 독립운동가와 옥구농민항일항쟁 등 임피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근대 독립운동사를 조명해 보았다. 작은 전시회 였지만 임피만이 갖고 있는 독립운동 자료를 향토문화와 접목해 패널을 만들어 임피역사를 찾는 방문객들에게 스토리를 전했다. 자연스럽게 독립운동 스토리가 있는 고을 임피를 선양할 수 있는 시간 이었다.

  독립운동가의 향토사료를 수집하면서 아직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평가받지 못한 민초들의 항일항쟁사가 많음을 느낀다.

올해는 옥구농민항일항쟁이 1927년 11월에 일어나 대구복심법원의 판결(1928. 9. 29)이 있은 지 90년이 되는 해가 된다.

1927년 옥구군 서수면에서 발생했던 옥구농민항일항쟁은 서수면 농민들이 일본경찰에 맞서 저항한 독립운동 이었다. 당시 서수면은 80%가 농민으로 이엽사 일제지주의 소작을 했으며 곡물생산량의 70% 이상을 착취당함에 항거하여 3.1 운동 연장에 서서 항일항쟁 의거를 일으켜 51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 34명이 구금자 탈취와 소요 치안유지법이 적용되어 전원 사상범으로 유죄판결을 내려져 복역한 전국 유일의 대사건 이었다.

당시 항일항쟁에 참여해 유죄형을 받았던 애국지사 34명중 18명만이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았다.(1993년 건국포장 1명, 2002년 3명, 2003년 건국포장 2명, 대통령표창 8명, 2004년 대통령표창 4명) 아직도 나머지 16명은 국가의 독립유공자 선정기준에 못 미쳐 10여년 이상을 서훈을 받지 못하고 미완의 상태에 머물고 있다.

  최근 옥구농민항일항쟁사업회는 서수면주민센터, 익산서부보훈지청과 공동으로 옥구농민항일항쟁 미서훈자 유족찾기를 시작했고 16명의 미 서훈자 포상을 재신청하기로 했다. 다행히 분위기는 독립운동가의 활동이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를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선정기준을 완화하겠다고 하니 미완으로 남아 있던 나머지 16명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기대할 만 하다.

  부연하여 을사늑약후 연재 송병선이 자결하자 시종하는 27세 여종 공임(恭任)은 대감이 나라를 위하여 순절하였으니 지하에 가서 대감을 모시겠다고 하며 성복(成服)한 다음,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부엌칼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100년전의 전설이 아니라 독립운동사 자료집과 대한매일신보(1906년 2월 23일자 道門義婢)에 그 사실(史實)이 전해지고 있다. 필자의 고향집 창문을 열면 연재 송병선 선생의 합장묘와 그 전방에 그녀의 충절을 기리는 비(義婢恭任之墓)가 세워져 있다. 이왕이면 100년전 자결한 의비 공임 할머니에 대해서도 독립유공자 서훈이 추서되기를 바란다.

최규홍   <군장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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