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교육을 사랑한다 (2)
국가는 교육을 사랑한다 (2)
  • 정은균
  • 승인 2018.07.12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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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균의 학교뎐 9]
 근대를 기점으로 학교의 ‘주인’이 종교에서 국가로 바뀌었다. 18세기 후반 근대 학교의 서막을 알린 프로이센은 <프로이센 일반 란트법>(1794)에서 “학교는 국가의 시설”이라면서 “모든 공립학교는 국가 감독을 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근대적 헌법의 효시로 인정받는 독일 <바이마르 헌법>(1919)에서는 “모든 학교제도는 국가 감독에 따른다”라고 규정하였다.

 근대 이후 학교와 국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다. 무엇보다 국가에 의해 철두철미하게 관리되는 기관이라는 전형적인 학교 상이 만들어졌다. 이에 맞춰 학교는 위계적인 관료주의와 상명하달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행정 시스템의 말단 집행기관처럼 인식되었다. 국가는 행정 라인을 통해 교장을 관리하고, 교장은 교사를 관리하였다. 교사는 교실에서 학생을 관리하였다. 교장과 교사는 교육자로서보다 교육행정의 관리자나 말단 집행관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갖기 시작했다.

 독일 교육법학자인 베커는 행정 시스템에 강하게 속박된 학교를 ‘관리된 학교’라고 정의하였다. 베커는 이런 학교에서는 상상력이 부족하고 대세에 순응하며 통제하기 쉬운 획일적인 인간이 길러진다고 보았다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엮음(2018),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학교혁명: 제3기 진보 교육감 시기의 학교정책>, 살림터, 56쪽.

나는 이와 같은 관리되는 학교의 전형을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내정 간섭기에 이식된 일본식 교육 시스템 안에서 본다.

 이 시기 학교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주성과 주체성을 상실한 우민(愚民) 양성이었다. 우민, 곧 ‘어리석은 백성’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을까. 당시 우리나라 교육 내정 간섭의 총책이었던 일본인 중학교 교사 시데하라가 대한제국의 신학제 시스템을 기획하면서 설파한 논리 속에 실마리가 담겨 있다.

 시데하라는 신학제가 인문교육이 아니라 기능교육에 치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문교육이 “국민의 감정을 과민하게 해 식민지 주민을 비생산적으로 만들고 불행을 동반하기 쉽다” 김태웅(2017), 위의 책, 207쪽.

 라는 이유에서였다. 개인이 오롯이 한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충실해지면 된다. 시데하라의 논리는 실용적인 기능 습득에 교육의 초점을 맞추면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을 억제시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 어려울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일반적으로 인문교육은 인간의 본질이나 세계를 보는 눈을 기를 수 있는 핵심 통로라고 이해된다. 우리는 개성이나 주체에 대한 인식, 인류 보편의 가치를 따지는 능력이 인문교육을 통해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인문교육의 문제를 지적한 시데하라의 말을 뒤집어 평가하면 자기 감정과 철학적 사고 주체로서의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주의 교육의 병폐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식민지 주민에게 감정 과민이나 비생산성을 가져오게 하는 인문교육을 시켜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국가가 자신의 목표를 위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국민을 길러내야 한다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꼭두각시 국민’을 양성하는 식민지 교육의 기조는 당시 식민지 조선 학교교육의 근본 철학을 기술한 <조선교육령>(1911) 안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 총독이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기 한 달 전쯤 공표한 훈시에서 조선인이 “공리를 논하고 실행을 멀리하”는 점을 언급하였다. 그는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과 국민교육을 통해 “제국신민(帝國臣民)의 실(實)”을 올리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하였다. 데라우치의 훈시에는 조선 식민지 교육의 두 가지 기본 방침이 숨어 있다. 충성스러운 국민 양성 교육과 2등 국민으로서의 조선인을 전제로 하는 저급한 실용 교육이 그것이다.

 데라우치 총독부의 관료들은 조선인이 “천황 폐하가 애무하는 제국신민”(조선총독부 초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이라고 보았다. 국가의 선도(교육)에 따라 천황에게 충성하고 순종해야 하는 신하 백성이 식민지 조선 교육의 핵심 목표였다. 제국의 신하 백성[帝國臣民]은 달리 말하면 ‘충성스럽고 선량한(충량한) 국민’이었다.

 일제는 충량한 제국신민을 기르자는 교육철학을 36년간의 강점 기간 내내 되풀이하여 강조하였다. <조선교육령> 제2조의 “충량한 국민 육성”을 필두로 이와 유의어적인 관계를 맺는 갖가지 표현들, 가령 “국민 도덕 함양”, “충량유위(忠亮有爲)한 황국신민 양성”, “부덕의 양성”, “양처현모로서의 자질”, “충량지순한 황국여성” 들이 국가주의에 터 잡은 일제 국민교육의 정신을 강화하였다.

 조선인을 2등 국민으로 전제하는 실용 교육은 <조선교육령> 제3조의 “교육은 시세와 민도에 적합하게 함을 기한다”로 드러난다.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이란 조선에 대한 차별화 교육이었다. 일제는 시대 정세나 조선인의 수준을 고려할 때 조선인을 대상으로 고상한 학문을 가르치거나 고급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들이 원한 식민지 조선인의 인간상은 국가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고 권력자나 지배자의 수족이 되어 성실하게 살아가는 ‘기계 인간’이었다.

 일제는 조선인을 포함하여 당시 일본 제국에 속하는 모든 신민이 만세일계(萬世一系)나 군신일체(君臣一體)와 같은 국체(國體)에 따라 하나로 묶인다고 강변하였다. 일시동인(一視同人)이니 내선일체(內鮮一體) 들을 들이대며 조선인과 일본인이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데라우치 총독은 어느 훈시에서 조선인 교육을 “하나의 사람으로서 일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의 말에서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이 표면적으로 실용 교육이라는 외피를 쓰게 된 명분을 읽는다. 이와 동시에 그러한 실용 교육의 목적이 조선인을 영원히 2등 국민으로 남게 하기 위한 차별화 정책이자 고도로 정치적인 기망술이었음을 알게 된다.

정은균 군산 영광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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