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네모 반듯한 바둑판 위에서 깨달은 인생
[리뷰]네모 반듯한 바둑판 위에서 깨달은 인생
  • 김미진 기자
  • 승인 2018.07.1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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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국악원은 국립국악원과 함께 작은 창극 \'화용도 타령-타고남은 적벽\'을 지난 6일과 7일 남원 국립민속국악원 예원당에서 선보였다.(국립민속국악원 제공)
 평소 불꺼진 무대위를 멍하니 바라볼 때 혹은 연희자들의 화려한 움직임과 함께 호흡할 때, 내 삶의 지난 시간들을 반추해 볼 수 있다면 썩 괜찮은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왔다. 무대 위 주인공이 밟고 지나간 삶의 발자취를 따라 내 지난날의 모습이 투영되는 순간, 머리가 아닌 가슴이 먼저 뜨겁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국립민속국악원과 국립국악원이 공동제작해 선보인 작은창극 ‘화용도 타령-타고남은 적벽’이 오랜만에 그러한 무대로 다가왔다.

 최근 남원 국립민속국악원 예원당에서 안숙선 명창이 조조 역으로 분한 작은 창극 ‘화용도 타령’을 만날 수 있었다. 판소리 다섯 바탕 중 가장 이해하기도 어렵고, 난해한 것으로 알려진 적벽가. 게다가 안숙선 명창이 판소리 인생 최초로 조조 역할을 맡게돼 매우 궁금해졌다.

 공연장에 들어선 순간, 군더더기 없는 세트와 깔끔한 조명은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소리꾼의 감정을 이끌어주는 소리북과 거칠고도 박진감 넘치는 철현금은 무대의 역동성을 높여주기 충분했다.

 간결하면서도 거대한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구성은 관객의 집중도를 높여줬다.

 ‘화용도 타령’은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화용도로 도망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그 안에는 조조의 패전과 실패, 권모와 술수로 가득한 삶이 그려있다.

 난리통 속에 벌어지는 떠들썩한 사내들의 입담이 여성 소리꾼의 섬세하면서도 찰진 소리 덕분에 귀에 찰싹 달라 붙었다. 절제되고 절제된 전체적인 무대의 분위기를 따라 귀를 기울이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또 관객들은 바둑판 위에서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를 이어주던 안내자 도원 덕분에 이번 창극의 주제와 의미를 보다 세밀하게 전달 받을 수 있었다. 잠깐 놓친 대목이 있더라도 어렵지 않게 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배려한 구성은 판소리를 감상하는 재미는 두 배로 이끌었다.

연출가가 말하고자 했던 의도대로 흘러갔다. 어지러운 난세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장수들의 모습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전장에서 겪는 장수의 심리와 내적 갈등의 모습이 시대를 뛰어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까지 진정한 삶의 의미를 되돌아 보게 만들었으니 성공이다. 이것이 바로, 진짜 민중들의 목소리였던 셈이다.

 국악의 다양한 콜라보 무대와 퓨전 음악 등의 새로운 시도로 국적 불명의 창극도 많아지고 있는 현실 속에 객석은 이같은 공연을 진지하게 기다렸을 것이라고 믿는다. 소리 한 소절만으로 수만의 군사를 불러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창극의 묘미이지 않던가? 수 십년 간 축적된 창극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토해내듯 덜어내고 덜어낸, 비워내고 또 비워낸 무대의 여운은 오래갈 터다.

그렇게 네모 반듯한 사각의 바둑판 위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살이라고 깨닫기 시작할 즈음, 조조의 마지막 춤사위가 시작됐다. 나의 시야에는 조조의 패전과 실패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깊이를 알 수 없고도 험한 명창의 길에 대한 회한이 밀물처럼 들어차기 시작했다. 커튼콜이 시작되는 순간에도 한동안 멍하니 무대 위를 바라볼 뿐, 박수 칠 수 없었던 이유다.

 김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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