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디네 앙 블랑과 한국의 반보기
프랑스의 디네 앙 블랑과 한국의 반보기
  • 최정철
  • 승인 2018.07.09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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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디에 앙 블랑(Diner en Blanc)’ 행사 모습

 1988년 프랑스에서 생겨난 ‘디에 앙 블랑(Diner en Blanc)’이라는 재미있는 행사가 있다. ‘흰색 저녁 식사(White Dinner)’라는 뜻의 이 행사는 참가자 모두 의상과 각자 지참하는 소품(피크닉 테이블, 와인과 음식 등)이 모두 흰색이어야 한다는 미션을 내세운다. 흰색으로 통일된 군중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넓은 공공장소를 순식간에 점령한 채 와인을 마시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흥겨운 파티를 즐기는, 엉뚱 발랄 깜짝 이벤트인 것이다. 워낙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보니 최근 한국에서도 이를 모방한 행사가 종종 시행되는 모양이다. 프랑스에 디네 앙 블랑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그 못지않은 멋진 행사가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 사람들이 잊고 있는 오래 전의 풍속 ‘반보기’가 그것이다.

 호랑이도 궐련 담배 피던 옛날, 양가 부녀자들은 함부로 외출할 수 없었다. 서로 알고 지내는 부녀자들끼리 소식을 주고받을 일이 있으면 아랫사람 시켜 소식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쩌다 필히 직접 만나야 하는 경우가 생길 때면 미리 사람을 시켜 두 집 사이 거리의 반쯤 되는 지점에 약속 장소를 정해 만나곤 했다. 또 여간해서는 친정나들이가 허락되지 않던 며느리들이 친정어머니가 사무치도록 보고 싶어지면 어렵사리 시어머니 허락 받고 나서 친정댁과 시댁 사이 반쯤 되는 지점으로 달려가 친정어머니를 부둥켜안고 회포를 풀곤 했다. 왜 반쯤 지점에서 만나느냐? 여인네들의 외박이 불허되던 시절, 해 떨어지기 전에 귀가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서로 반씩 나가서 본다하여 ‘반(半)보기’라 부른 것이다. 원래 중부 이남의 농촌지역에서 행했던 풍속으로 양가 부녀자들끼리 혹은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 간의 ‘번개’ 프로그램으로 많이 활용되던 이 반보기는, 점차 남녀를 떠나 동년배끼리의 모임용으로 나아가서는 지역 간 교류 성격으로까지 발전했다고 한다. 우리 조상님들의 위대한 지혜가 발휘되는 대목이다. 재미있는 것이, 이 반보기에 디네 앙 블랑과의 유사성이 있다. 디네 앙 블랑의 기본 미션이 ‘흰색 옷 입고 참석하기’라면 우리네야 원래 백의민족이었던지라 아무렴은 대부분 흰색 옷을 기본으로 받쳐 입었을 것이니 흰색 옷차림 미션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또 이 반보기 만남에도 음식이 수반되었다. 만남 장소에서 각자 준비한 음식 펼쳐놓고 환담과 정을 나누며 외식을 즐겼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디네 앙 블랑의 원조는 우리의 반보기가 아닌가 하는 농담 섞인 주장도 가능해 진다.

 반보기를 얘기하는 것은 우리도 디네 앙 블랑처럼 떼로 만나 한바탕 먹고 마시고 놀기만 하자는 것이 아니다. 반보기가 개인 간 인화(人和)는 물론이요 지역 간 화합 결속까지 넘보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가 다중화(多衆和) 다개화(多個化) 되면서 서로 외면하고 살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이다. 이 반보기에 오늘의 시의를 대입할 수 있다면 우리식의 디네 앙 블랑, 훌륭한 현대판 반보기가 탄생할 것이다. 이번에도 지방선거 열풍 속에 지역 내 여러 공동체 간 개인 간 분열과 갈등이 숱했을 것이다. 이제는 결과 시원히 인정하고, 공간적 심리적 중간지점을 정해 서로 반씩 양보하고 서로 반씩 다가가는 반보기 만남으로 해원화합상생 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디네 앙 블랑 같은 즐기기 이벤트도 좋지만, 잊혀간 우리네 전통 풍속도 살리고 기왕 하는 김에 소중한 의미도 얹음으로써 우리의 정서에 맞는 아름다운 인문 유산이자 건전한 사회문화행위로 발전 확산 전승하는 것, 그것이 멋진 조상님들을 둔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 한다.

 필자는 올해 10월에 개최하는 서울 한양도성문화제를 맡아 준비 중인데 이 반보기를 주요 프로그램으로 운영할 예정이다. 단체 가족 개인들이 참여해서 620년 역사의 도성 길을 걸으며 민족 유산의 위대함에 자긍심도 느끼고, 만남의 장소에서 서로 마음 맞추어 인적 결속도 다지고, 더불어 명사와 함께 하는 소품 공연도 즐기기로 꾸며진다. 전주 출신 사람이 세운 나라 조선의 수도 한양, 그 한양의 수호도성이니 만큼 전주 시민과 전북 도민 분들도 주말을 이용하여 참여해 보길 권한다.

 / 글 = 최정철 서울시 한양도성문화제 총감독(『성공을 Design하는 축제실전전략』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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