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교육을 사랑한다 (1)
국가는 교육을 사랑한다 (1)
  • 정은균
  • 승인 2018.06.28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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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균의 학교뎐 8]
 나는 ‘살인 여행’ 같은 극단적인 훈련을 통해 능수능란한 전쟁 기계를 만들어낸 고대 스파르타 학교교육의 은밀한 전략이 그들만의 특별한 시공간에만 존재했던 예외적인 사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모양으로 길러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관점은 국민국가 이념이 국가 운영 책략의 전면으로 부상하였던 근대 이후 더욱 강력해졌다. 학교와 학생은 필연적으로 국가를 위해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손쉽게 동원하고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학교가 학생 100명 중 99명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공간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이 국가 통치 철학으로서의 폴리스(police)론을 철저한 교육국가론으로 변용하여 받아들임으로써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역사적 사례도 알고 있다. 나는 이들이 윌리엄 보이드가 적실히 비유한 “가르치는 국가”의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가르치는 국가, 곧 교육국가론의 이념은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이 있을까.

 교육국가론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까지 소급된다. 개략적으로 보아 ‘교육’과 깊이 관련되는 고대 그리스의 ‘국제’와 라틴어 ‘폴리테이아(politeia)’를 거쳐 ‘폴리스(police, Polizei)’로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적 계보를 갖는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국가>에서 나라(폴리스) 일을 도모하는 수호자들이 특별히 교육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교육과 양육 체계야말로 국가에 “한 가지 큰 것”이라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런 점에서 국가는 교육을 사랑한다

 교육국가론은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옥중 노트>(1929~1935)에서 적극적으로 개진한 개념이기도 했다. 그람시는 근대국가를 ‘교육자(educatore)’의 관점에서 정의했다. 그람시 유의 교육국가론은 국가가 국민을 일정한 목적에 따라 가르치면서 이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둔다. 그는 <옥중 노트>에서 국가가 “새로운 형태의 인간성을 물리적으로도 만들어 내는 것을 언제나 주요 목적으로 추구”하는 교육적 임무를 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와 같은 임무는 기본적으로 법률의 영역 안에서 이뤄진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법률이 관여하지 않는 시민사회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사람들의 관습, 사고와 행동의 양식, 도덕의 존재 양태 등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실현되기도 한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전방위적이다. 일본 교육학자 시로즈 히로노부는 <폴리스로서의 교육: 교육적 통치의 아르케올로지>(2017)에서 교육국가의 국민이 가족과 학교와 의료 시설과 보건 시설과 미디어 들의 장치를 매개로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토스를 혈육화(血肉化)할 때까지 언제나 교육받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한 국가나 사회는 국가 통치자의 교육이 원활하지 않을 때 내부 붕괴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교육국가론의 이념을 서구보다 더 철저하게 받아들인 일본은 ‘가족=작은 국가, 국가=확대된 가족’과 같은 정식을 전사회적으로 구체화했다. ‘일국(一國)=일가(一家)’, ‘정부=부모’, ‘인민(人民)=자식(아이)’이라는 관점이 근대 일본 경찰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으로 평가된다는 <경찰수안(警察手眼)>(1876)에 등장하기도 한다.

 근대 일본의 주요 국가 책략이었던 교육국가론은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조선(대한제국)의 교육 시스템을 집어삼켰다. 그 스산한 역사를, “일본발 국가주의의 거대한 배양장”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디딤돌 삼아 살펴보자.

 1905년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당했다. 이후 노골적인 내정 간섭을 일삼던 일본에 의해 1910년 8월 29일 결국 강제적인 한일합방에 이르게 된다. 519년 동안 27명의 국왕이 통치하던 조선 왕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36년간 이어진 치욕적인 강제 점령의 역사가 시작됐다.

 일본발 국가주의 교육은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후 시점부터 우리 교육에 본격적으로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한 가운데 일본인 중학교 교사 시데하라 다이라가 있었다. 시데하라는 1905년 일본이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내정 간섭을 위하여 총책을 맡긴 인물이었다. 그는 일개 교사였으나 대한제국 정부의 학정참여관이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우리나라 교육 전반의 문제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고, 한국 정부 각의에 출석하여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등 막강한 권한이 있었다.

 시데하라가 <한국교육개량안>에서 대한제국 교육의 기본 방침으로 정한 기조가 점진적 동화주의와 우민화 정책이었다. 점진적 동화주의 정책의 핵심 기반은 일본어 교육이었다. 보통학교 저학년부터 일본어를 학습하게 하고, 초등교사 양성기관인 사범학교의 상급 학년에서 일본어로 교수하게 하는 것 들이 구체적인 조치였다. “교육은 한국 신민을 일본에 감화하는 것을 주안으로 한다”라는 일본 본국의 각의 방침도 일본어 교육을 통한 동화주의 정책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의 우민화 정책은 실용주의와 한국인 차별화에 초점을 맞춘 교육철학을 기반으로 추진됐다. 시데하라는 이를 학제 개편으로 구체화하였는데, 크게 네 가지 사항을 강조했다. 수업 연한 단축, 학제와 과정의 단순화, 고등교육 유보, 인문교육보다 기능교육 치중 들이 그것이었다. 이들은 1906년 8월 27일 제정 공포된 <보통학교령>에 적용되어 이후 1911년 <조선교육령>이 공포되기까지 식민지 교육의 골간이 됐다.

 1906년 <보통학교령> 공포로 본격화한 학제 개편은 ‘소학교’라는 이름을 ‘보통학교’로 바꾸는 데서 시작됐다. 수업 연한은 종래 5~6년이었던 것을 4년으로 단축하고, 수업 일수와 학년 학기제와 교과목 체제 등을 정리했다. 학년 4월 개시, 학급제 채용, 교원의 배치 등에 관한 규정도 정했다. (계속)

정은균 군산 영광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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